[시&감상: 기형도 시집《입 속의 검은 잎》을 읽다]
추석이다. 아침 일찍 아들 내외가 다녀갔다. 딸과 사위가 손주들을 데리고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아니 오늘 못 오고 글피쯤 올 수도 있다. 이리저리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다. 무얼 할까 망설이다 눈앞에 있는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들었다.
표지 글에서 시집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크 현실주의로 명명될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 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현실주의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로테스크란 괴상하고 기이함을 뜻한다. 괴상하고 기이한 현실주의가 그의 시 세계란다. 거기에다 우울한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들의 기억을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시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니 모순된 진술이 극을 달리는 기분이다. 시적 변용이 주는 힘이랄까 아니면 비장미에서 주어주는 역설의 미를 말함인가. 애매하고 모호한 표지글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시인도 그렇고 이 표지글을 쓴 작가도 그렇고 나에게는 둘 다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온다.
아래의 시가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이다. 입속의 검은 입은 이미 죽은 잎이다. 어떤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 우울, 공포, 택시 속 죽은 그를 싣고 가는 그의 심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 번이고 읽어 본다.
*택시 운전기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기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는 그의 시작 메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한다'는 말에서 핵이 되는 것은 '무책임'에 있다. 허투루 자연을 빌미로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도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기형도를 알고자 시집 말미에 있는 김현(문학평론가)의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를 발췌 요약 해 본다.
*1988년 11월 그는 젊은 나이에 갔다. 1989년 새벽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에서 죽었다. 그의 가장 좋은 선배 중의 한 사람인 소설가 김훈은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기형도는 귀천의 시인 천상병만큼이나 가난했다. '누이는 공장에서 일하고 아버지는 누워있고 어머니는 콩나물을 팔러 갔다. 그리고 치유될 길 없는 병, 문학 평론가 김훈은 시집 해설에서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를 바쳤다. 천상병은 그래도 가난을 죽는 그날까지 한 잔 술로써 낭만으로 즐기며 갔다면 젊은 시인은 허망하게 가난의 실존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그렇게 새벽안개처럼 피었다가 사라졌다. 전 편을 흐르는 어두침침한 분위기 하지만 그로테스크 한 시어 속에 스민 꿈틀거리는 사유의 깊이와 빛남이 입 속의 검은 잎을 끝까지 씹게 한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김현은 '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 (-개인적인 것 - 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그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음미하며 기형도에 대한 이해를 나름 마무리해 본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 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지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평론가 김현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시 하나를 빌려, 기형도의 넋을 달래고 있다.
*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이 세상은
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
묻는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으리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김병옥 역> (202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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