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다시금 서문시장]

백두산백송 2023. 11. 2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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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란 주제로 테마수필을 써 보았다. 앞으로는 테마수필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영역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특정의 테마를 가진 글들이 끼리끼리의 문화를 형성하며 독보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티스토리의 세분화된 카테고리와 주제별 분류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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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 다시금 서문시장]

서문시장을 찾았다. 선거철이면 대구의 민심을 알기 위해 정치인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저런 추억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군입대부터 신혼 초까지 내 일상을 지배했던 곳. 부모님이 경영하셨던 이불가게, 혼수이불을 만들어 도매로 삶의 텃밭을 일구었던 곳. 그때 그 추억이 그리워 야시장이 열리고 있는 서문시장을 오랜만에 들렀다.

사십 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부모님이 계셨던 혼수가게를 중심으로 기억 속의 상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를 이은 상점들이 서문시장을 그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져 늦밤 나는 셔트를 마구 눌렀다. 그때 그 철물점, 금은 수저, 그릇가게, 그렇게도 익숙했던 상점들......

시장 곳곳의 공백을 먹거리 쉼터로 만들어 놓고 낮을 밤으로 이어가는 야시장 먹거리들이 먹성을 유혹한다. 각종 꼬치들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는 생소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젠가 갔었던 웨이하이 야시장 풍경이 떠오르는가 하면 대만 협곡시장을 연상케도 한다. 삼 년 여에 걸친 코로나 영향 때문인지 그리 많지 않은 발걸음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신구(新舊)의 조화, 요소요소에 잘 정비된 상점들과 떡하니 들어선 대형 주차장이 시장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듯 들숨과 날숨을 토해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재래시장이 살아야 민심이 살고 민심이 통해야 나라가 사는 것은 하늘의 이치가 아니던가. 어디 민심이 곧 천심이란 말이 그냥 나왔으리오. 서문시장 돔천장이 점점 더 높게 솟구치면 좋겠다.

그 옛날 그 시절 그렇게 흥성거렸던 번영회 사무실, 이층 화장실과 지하 통로 계단 옆 커피숍은 그대로인데...... 시장 구석구석을 기웃거려 보는 내 마음이 그리 밝지는 않다. 인심 좋게 다닥다닥 붙어 앉아 혼수이불을 펴고 말며 신혼의 단꿈을 빌던 그 여유롭던 얼굴들. 아날로그적 향수에 젖은 골동품 같은 내 의식이 문제인지 아니면 급속으로 변해버린 디지털시대의 속성 때문인지 서문시장이 옛날 같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손님,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다 내렸으면 빨리 저를 보내 주세요". 인공지능 AI가 상냥하게 기계음을 토해내고 있다. 인심 좋게 손으로 말아 올린 칼국수 한 그릇을 내밀던 그 시절 그 할미의 손길이 그리워짐을 어이하나.

-"서울 1964년 겨울,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어묵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그날밤, 우연히 만난 세 사람.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안이라는 대학원 학생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 그리고 주인공인 나." - 손에 들고 있는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힐끗 넘겨본다. 나에게 있어 소설의 주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찌 생각해 보면 횡설수설 지저분한 이야기의 연속, 끝내 그날 아내의 시체를 팔은 돈으로 세 사람과 함께 투숙, 각기 다른 방에서 잠을 자는 사이 자살해 버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예의 사나이. 어두운 시절, 어두운 이야기의 끝이 1964년 겨울, 혼돈의 서울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실린 "서울 1964년 겨울"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마도 이것은 사십여 년 전 내가 보고 겪었던 서문시장의 장면과 일치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칙칙하고 어두운 그림자들이 활개를 쳤던 그 옛날 그 시절, 서문시장 뒷골목...... 그때도 우리는 친구들과 그늘진 시장판을 때론 낭만으로 때론 슬픈 웃음들을 마구 그리며 날밤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낡은 지붕 아래 인간미가 철철 넘쳤던 기억들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나를 인정스럽게 챙겼던 좌판 나물집 아주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서문시장을 한 바퀴 돌아 지상 3호선을 탔다. 저만치 멀어지는 서문시장이 여름밤 등살에 축 늘어져 있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추억, "~골라골라 마구 골라~~". 월남치마 한 자락이 신천물줄기를 덮친다.

신천둔치, 칼라풀에서 파워풀로 바뀐 한마디 말 때문인지 나에게는 요즘 신천의 물줄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얼마나 힘 있고 멋있는 말인가. 처음 이 말을 듣고 보는 순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무언지 모를 힘이 솟구쳤다. 다시 힘 있게 일어서고자 하는 의욕적인 이 한마디 말이 때론 맥 빠진 일상 속 한 알의 비타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마디 말이 주는 힘이란 이런 것인가. 시나브로 우리네 일상을 어딘지 모르게 긍정의 힘으로 몰아가는 느낌, 서문시장도 파워풀 대구에 발맞추어 그 옛날 그 시절처럼 파워풀하게 다시금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서문시장 하늘을 덮고 있는 대형 지붕 돔 위로 철새 한 마리가 여유롭게 날아가고 있다. 서문시장이여, 다시금 비상하라.(2023.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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