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혼불 여정]

백두산백송 2023. 11. 2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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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혼불문학관

<혼불문학관>을 다녀왔다.   소설 《혼불》을 읽고, 김병종의 《화첩기행 1》(문학동네, 2014)을 참고하여 기행문 형식의 수필을 써 보았다.

혼불문학관은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20번지 노봉마을에 있다.

《혼불》은 끝내 미완성 대하소설로 1980년부터 1996년 12월까지 17여 년 동안 작가가 혼신을 다 바친 영혼의 은유요 상징이다.

매안 출판사에서 출간한 <5부 10권>의 전질을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1부 1.2권>은 정성을 다해 읽었고 나머지는 그냥 눈으로 스치듯 했다. 통독이란 말도 부끄럽다.  시간을 두고 읽을 때가 있으리라고 본다.

답사후기라서 여정과 견문, 객창감이 필자의 감정에 치우쳐 본질을 흐리게 했을 수도 있음을 양지 바란다.

참고로 큰 목차를 밝혀 둔다.

1부(1.2권) 흔들리는 바람
2부 평토제(3.4권)
3부 아소, 님하(5.6권)
4부 꽃심을 지닌 땅(7.8권)
5부 거기서는 사람들이(9.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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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 혼불 여정]

"서도역"이 스치는가 싶더니 노적봉과 벼슬봉에 둘러싸인 혼불문학관이 일행을 반긴다.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 소설 속 작가가 남긴 말을 새긴 비석이 혼불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미 읽고 온 대하소설 혼불이 주는 감(感)이리라. 최명희, 51세의 나이로 미완성의 혼불 5부작, 전 10권을 남기고 떠난 영정(影幀)이 싸늘하다 못해 섬뜩하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인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집필 과정에서 남긴 말, 그녀의 글방인 성보암 책상 앞에 놓여 있는 만년필이 가슴을 콕 찌르는 것만 같다.

잠시 성보암 책상에 앉아 본다.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놓인 기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싸늘한 방에 한 줄 노랫가락이 필요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애타는 서정(抒情), 소설 속 강모와 사촌 강실이를 상피(相避)로 엮은 서사(敍事)를 두고 작가는 얼마나 고민에 빠졌을까. 그리고 아내 효원이를 덥석 품은 날이 강실이와 관계를 맺은 그날 밤이라니. 소설은 또 이렇게 엮어야만 흥미로울까. 근친상간(近親相姦), 첫 단추를 잘못 꿰어버린 강모의 일생이 기생 오유끼와 허우적거리며 역사는 흘러간다. 청암부인, 이기태, 율촌댁, 효원이와 강모, 강실, 왜 소설 속 인물은 이렇듯 힘겹게 대를 이어갈까. 답이 없는 현실, 평토제로 넘어가는 길목을 멍하니 바라보는 성보암 쾌종시계는 이미 멈추었고 노적봉 아래 거멍굴은 고요를 너머 적막하다. 천추락만세향,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를 모아 만든" 청암저수지가 그저 봄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맡기고 있다.

시나브로 혼불이 빠져나간 느낌이다. 점심때 먹은 반주(飯酒)가 살짝 올라온다.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이요, 落花盈我衣(낙화영아의)라.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이요,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라. 한 잔 술에 거닐어 보는 오작교, 한 마리 새도 최명희도 없는 빈 하늘, 두둥실 한 점 구름이 연못 잉어를 품고 있다. 생뚱맞게 나는 이백(李白)의 시 자견(自遣)을 들먹이며 춘향이 노닐던 광한루를 돌아 김병종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병종, 그는 그녀를 "육신을 허물고 혼불로 타오른 넋"이라고 했다. 미술관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이다. 건물이 그림이고 그림이 미술관이다. 그의 미술관이 광한루 맞은편 춘향테마파크 언덕에 자리 잡은 것이 못내 아쉽다. 실로 매안마을 혼불문학관과 나란히 둥지를 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작가 최명희의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인연을 맺은 두 사람, 최명희와 김병종.  김병종의 <화첩기행 1>(문학동네, 2014)에서 그는 어느 가을날 광화문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소설 혼불을 읽고 워낙 감동이 커서 "소설이라면 혼불 1권으로 족하다"라고 평했던 사람. 김병종. 끝내 최명희로부터 한 잔 차를 얻어 마시지 못하고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읊었던 인물. 그녀가 그리울 때는 무시로 혼불문학관을 찾는다는 그가 쓴 책들의 제목들이 눈길을 끈다. <내 영혼을 만지고 간 책들>,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칠 집 김 씨 사람을 그리다>, <감히 아름다움>, <시화 기행 1>, <시화 기행 2>. 미술관 한 모서리에 잘 정돈된 그의 책들을 보는 순간 나의 호흡은 가빴다. 그림과 시와 그리고 수필, 불멸의 예술혼이란 이를 두고 말함인가. 또 하나의 혼불이 미술관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김병종과 최명희, 나는 그의 미술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그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마리 새였다. 최명희보다 대 여섯 살 아래라고 밝힌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그림 속 한 마리 새는 최명희의 넋이런가. 방향 감각을 잃고 하늘과 땅, 이곳저곳을 나는 듯 걸어가는 모습이 암투병을 앓았던 작가 최명희의 환영처럼 다가온다. 그가 그린 말(馬)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목이 가늘고 온몸이 말라붙은 가는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림 중 제목 "웃는 말(馬)"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등에 앉아 있다. 암 투병 중이면서도 혼불 완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그녀를 업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추상화(抽象畵)로 다가오는 그림이란 이래서 이런 묘한 상상을 하게 하는 마력이 있는가 보다.

그녀는 갔지만 그녀를 기리는 마음이 미술관 곳곳에 묻어 있는 느낌이다. 몸이 잘려나가고 이상한 순백의 형상들이 있는가 하면 미술관 유리창을 벽한 가두리 물은 수평선을 머금은 바다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청암호수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은 소설가요, 또 한 사람은 화가면서도 시인이요 수필가다. 김병종이 남긴 글과 그림의 조화, 최명희가 그에게 정성을 다해 쓴 육필 편지, 출렁이는 물결 속 그림들을 보며 청암호수 위를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가슴에 품어 본다. 사랑, 그것이 바로 혼불인 것을......

혼불 여정,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성보암'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그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았다."라고 말한 그녀의 마음을 되씹어 본다.(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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