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낙서는 내 마음이다]
낙서는 내 마음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리저리 갈겨 놓은 낙서를 보면 그것은 바로 어지러운 내 마음 그대로다. 동일한 말이 반복되고 있는가 하면 몇 번을 읽어 보아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낙서를 하고 나면 어느 듯 내 마음은 잔잔한 호반을 거닐며 나비와 잠자리가 되어 날기도 한다.
나는 낙서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딱히 무엇을 해야 할 일이 없을 때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낙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낙서를 한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그림을 그려 놓았거나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냥 갈겨쓴 것을 보며 웃기도 하고 때론 스스로 민망해 하기도 한다.
한 번은 낙서를 하다 이상하리만치 길게 그린 여인의 코에 내 눈이 붙어 있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한참을 바라보며 긴 여인의 코에서 내 입술을 찾았고 둥글게 뒤집힌 내 눈은 여인의 사랑을 훔치고 있었다. 분명 내가 그린 낙서 같은 그림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쫓고 있었다. 남편 헤파이스토스를 맞이한 아프로디테, 그녀는 바람의 여인이 아니었던가. 자기가 원하는 남자라면 아무 하고나 연애를 하며 지칠 줄 모르고 바람을 피우는 여신, 그 정부는 전쟁의 신 아레스였다. 둘의 사랑은 신천지를 누볐고 마침내 원치 않는 아이들을 잉태하며 비극은 시작되었다. 남편 헤파이스토스의 복수, 결국 간통죄로 인해 뭇 신들의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린 여신, 나는 이 아프로디테의 꽁무니를 길게 그리면서 나만의 쾌락에 빠지고 있었다.
또 한 번은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할 욕설을 갈겨 놓고서는 혼자서 얼마나 웃었던가. 나도 내 머리에서 이런 해괴망측한 욕설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낙서를 하고 보니 실로 개 X는 욕도 아니다. 거기다 씨 X를 더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욕에도 등급이 있다면 아마도 1등급은 족히 되리라. 하지만 이 더러운 욕에도 무슨 마력이 있는지 입에 담지 못할 그 욕설을 몇 번 하는 사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카타르시스도 이런 카타르시스는 없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낙서, 요놈이란 무언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예의 낙서에서 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생각하며 요런조런 통속적 쾌락을 꿈꾸었는가 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그리도 내 마음이 후련해지며 평심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흔히 말하는 심심풀이 낙서지만 언제부터인가 하얀 종이 위에 낙서를 하면서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이렇고 보면 낙서는 나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심리적 치유나 방어기재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낙서, 어쩌면 이것은 내 마음의 현주소요, 내 마음을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편이어라.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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