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말분 연정(戀情)]

백두산백송 2023. 12. 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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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明心寶鑑)의 저자 '추적(秋適)'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인흥서원(仁興書院)'. 유형문화재 제37호인 명심보감판본(明心寶鑑板本) 31매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소재.

[명상수필: 말분 연정(戀情)]

말분 씨,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도심 속 서당(書堂) 모서리에 앉아 있는 말분 씨는 한 때  내 가슴 한 쪽을 스쳐간 말분이와 이름이 똑같다.

말분이는 얌전하고 예뻤다. 너무 이른 나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고만고만한 나이에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던 말분이, 그 말분이가 지금 서당 한 구석에서 명심보감(銘心寶鑑)을 들고 같이 앉아 있다. 나에겐 이미 명심보감은 물 건너갔다.

추억의 말분이, 그 말분이와 많이도 닮은 말분 씨, 이름도 같은데 생김새도 비슷하다.  믿거나 말거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추억의 언저리를 살짝 스쳐간 동심 어린 연정의 그녀, 그녀가 지금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6남매 중 내리 딸 다섯의 끝자리를 차지한 말분, 어쩌면 분에 넘치는 애증(愛憎)의 이름이 아닐까. 용케도 순산(順産)으로 이어진 딸 자리를 마무리하고 두 쪽 불알을 어버이에게 선사한, 그래서 마음 한편 서러움을 간직한 채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흩날릴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말분,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잠 못 들어하노라." 말분이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이미 봄밤이다.

가끔은 추억의 연인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술에 빠지고 여자는 커피에 몰입한단다. 추억의 입술도 술이라면 꿈에서라도 실컷 들이키고 싶지만 무수한 세월 그 시절 그 입술도 이제는 곰삭은 식해(食醢)인 것을.

모르긴 해도 내리 삼 년(三年)을 공부한 탓에 나이 이순(耳順)을 너머 기어이 한자 1급 자격증을 따고 보니 훈장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말분 씨. 말분 씨 이름을 자랑삼아 부르고 부르는 훈장의 얼굴에 보람 섞인 능청이 묻어난다. '주불취인인자취(酒不醉人人自醉) 요, 색불미인인자미(色不迷人人自迷)'. 술이 사람을 취하게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색이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정신이 혼미하여지느니라.

'인불학(人不學)이면 부지말분(不知말분)이라', 내가 명심보감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말분이를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말분, 그녀도 나와 함께 어린 시절 할아버지 담뱃대를 가로질러 화톳불 벌건 아랫목에서 하늘~ 천(天), 따~ 지(地)를 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 말분이 한자 1급 자격증을 들고 오물오물 명심보감을 씹고 있으니 내 마음은 연모지정(戀慕之情), 그 옛날 향수(鄕愁) 임을 어이하리.

도심 속 서당(書堂), 훈장은 소주를 미주(美酒)로 여기는 이름하여 소주 시인이요, 소주에 한문(漢文)을 말아 훌훌 마시는 보기 드문 현대판 훈장이요, 인자(仁者)한 재능기부자다. 열 명 내외의 남녀가 한방 가득 명심보감을 들고 있다. 나이 불문 남녀노소, 서당 문을 열고 보면 미세먼지, 황사가 춤을 추지만 훈장 따라 한 자(字), 한 구절(句節) 보감(寶鑑)을 세심(洗心)으로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고와만 보인다.

말분 씨, 그 옛날 추억의  말분마냥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를 읊조리는 입술이 보면 볼수록 말분이를 닮았으니 내 마음 나도 몰라 명심보감 한 구절에 막걸리 한 사발이다.

'소년은 이로하고(少年易老), 학난성(學難成)이라. 일촌광음(一寸光陰)이라도 불가경(不可輕) 하라. 미각지당(未覺池塘), 춘초몽(春草夢)인데 계전오엽(階前梧葉), 이추성(已秋成)이라.'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아직도 못 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하였는데 세월은 빨리 흘러 섬돌 앞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말분,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어느 곳에서 옆자리 말분 씨처럼 보감(寶鑑)으로 익어 가고 있을까. 말분 씨의 얼굴에  말분이가 오버랩되고 있다. 부지불식(不知不識), 말분 연정(戀情)을 어이하랴. 겨울낙엽 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가 이내 날아가 버린다.(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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