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꽃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몇몇 문우들과 몇 해 전 고적답사를 다녀왔다. 봄비가 내리다 말고 화창한 봄날로 바뀌었다. 포항 흥해읍 칠포리에서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암각화와 성혈을 본 뒤 경주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릉으로 향했다.
'흥덕왕, 신라 제42대 왕이자 헌덕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수종 또는 경휘,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 왕위에 올라 골품제를 강화 등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개혁. 청해진과 당성진을 개척,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 대사를 맡게 하여 해적의 출몰을 방지하고 해상 왕국을 건설했다.'(출처:다음백과 나무위키)
가는 도중 '성혈'이 자꾸 떠올랐다.해설사는 구멍 속에는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물로 이어지는 역사의 근원을 생각하며 흥덕왕과 비(妃)의 사랑을 극화시켜 보았다. 왕인 수종과 아내 장화부인. 흥덕왕은 애처가 였다.혼인 한지 한 달 만에 유명을 달리한 부인을 잊지 못해 사후(死後) 합장(合葬)을 유언으로 남긴 흥덕왕의 애틋한 사랑을 그려 보았다.
흘러가는 물길 따라 역사는 이어지는 것. 그 작은 구멍 속에도 역사는 흐르고 있었다. 경북 칠포리 곤륜산 계곡 옆 바위면에 새겨진 암각화, 그 구간마다 파 놓은 알구멍, 성혈(性穴)을 거쳐 흥덕왕릉을 찾은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화창한 봄날, 선사(先史)의 흔적이라는 작은 구멍들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암각화를 둘러싼 성혈, 그 속에는 물이 흘렀고 물은 역사를 이어 천 년 고도(古都) 경주를 향해 흥덕왕릉(興德王陵)을 파고든 듯 했다.나름의 눈에 박혀버린 성혈들이 장화 부인(章和夫人)의 옷깃 문양으로 되비친다.
신라 제42 대 흥덕왕의 비(妃), 장화 부인(章和夫人)은 축 늘어진 소나무 숲 속에서 남편인 수종(秀宗)을 껴안았다. 흥덕왕은 성은 김 이요, 이름은 수종 또는 경휘라고도 했다. 비록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비(妃)였지만 수종은 비를 잊지 않고 지금의 경주 안강현(安康縣) 도솔천 아래 다시금 나란히 누웠다. 이것이 현존 사적 30호로 합장된 흥덕왕릉이다.
참으로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사별(死別) 후 10년 세월, 그리도 수종이 그리워했던 두 손 합장(合掌)이 합장(合葬)으로 한 몸이 된 기쁨을 어이하리.후다닥 지나가 버린 재위(在位), 혼례 후 한 달 만에 세상 떠난 비운의 아내를 두고 허접으로 살아온 세월, 후궁을 얻어 두 아들을 두었지만 끝내 왕위를 물려주지 못한 당신. 결국 죽음 앞에서 합장(合葬)을 해 달라고 했던 그 마음을 첩(妾) 또한 어이 모르오리까.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늘도 무심이라 이 무슨 천추의 한이란 말이오. 이렇듯 참으로 원통하고 원통한 것이 우리의 운명. 하지만 흐르는 세월 구름 사이로 당신과 나란히 누워 있는 분묘(墳墓)를 ‘금슬(琴瑟) 좋은 왕릉’이라 칭하며 오고 가는 후손들이 사후(死後) 사랑의 징표로 삼으니 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소이다.
당신 말씀 듣고 보니 소쩍새 우는 봄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때 외로운 비석 쓸어안고 울고 우는 그 소리가 바로 당신의 한 맺힌 사랑이었구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내 마음 알아주니 참으로 고맙고 고맙소. 때마침 화창한 봄날, 글벗이라 칭하는 이들이 쌍쌍이 때를 지어 한바탕 신명을 풀고 있으니 우리도 오늘 하루 풀어진 가슴 축 늘어지게 후원을 한번 거닐어 봅사이다.
부인, 늘 누워 있다 보니 우리가 사는 집이 이렇게 크고 우람한 지를 정녕 몰랐구려. 아니 우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 둘레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보구려. 자, 축, 인, 묘...... 우리 합장(合葬), 천 년 세월, 못다 한 사랑, 사후 영혼, 영원 지킴이라. 훨훨 날아 도솔천을 함께 한 보람이 여기에 있구려. 그리고 저 아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보오. 아무리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소이다. 짐작컨대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서역인이나 아랍인 또는 페르시아인들 인가 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잖소. 분명 내 그네들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일렀건만 이들이 우리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지금은 이 땅에 많이들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려.
그건 그렇고 여기 이쪽 귀부(龜趺)에 있었던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어디를 가고 없소이까. 당신과 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없어진 걸 보니 우리의 사랑을 지금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있기는 있는가 보오. 하나 그리 괘념치 마소서. 사람도 사람이거니와 천 년 세월에 묻은 일들이 어디 사람만의 일이겠소. 오죽했으면 내 사랑 당신 위해 십이지신, 사자 네 마리가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겠소. 이런저런 걱정들이 고금(古今)을 달리 별반 차이가 있겠소만 나를 만나 한 달 만에 병을 얻어 사별한 몸이고 보니 당신 몸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도 쇠해 보이는구려.
잠시 탱석 아래 앉아 차라도 한 잔 먹세그려.그래 올시다. 장보고를 통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서해를 방어하게 했던 그때, 당신도 없는 마당에 당나라로부터 차(茶)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민다오. 모르긴 해도 무수한 세월이 흐른 탓인지 그때 그 차(茶) 맛은 아닌 것 같구려. 하긴 차(茶) 맛도 차(茶) 맛이련만 어디서 돼지머리 냄새가 나니 이제 그만 궁宮으로 갑사이다.
왕릉 앞 무리를 지운 객들의 한판 신명이 끝날 즈음, 어디서 날아왔는지 소쩍새 두 마리가 화표주(華表柱)를 맴돌고 있다. 복사꽃 붉은 봄 하늘 아래 흥덕왕릉(興德王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애절한 사랑, 칠포리 그 성혈(性穴) 속 물은 흘러 흘러 이렇듯 천년 세월 못다 이룬 사랑을 화표주(華表柱)로 굳게 했음인가. 장화 부인(章和夫人)과 수종(秀宗) 흥덕왕(興德王)의 사랑이 능(陵)을 박차 오르며 승천(昇天)하는 느낌이다. 사후(死後) 합장(合葬), 영원한 사랑, 꽃비라도 줄줄 내렸으면 좋겠다.(202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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