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백두산백송 2024. 2. 21.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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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시구(詩句)를 화두(話頭)로 삼아 생각에 잠겼다. 이른 봄날이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구 중에 하나다. 출전은 자판을 치면 바로 나온다.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 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昭君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관문을 열면 축대 옆에 모란이 있다. 족히 삼십 년은 살아온 모란이다. 꽃대도 나이를 먹으면 시커멓게 나이테를 두르는 것 같다. 춘래불사춘, 우수 지난 모란 꽃대가 살짝 떨고 있다.

봄바람이 현관 앞까지 치고 올라왔다. 겨우내 움츠렸던 모란 꽃대에 아직은 입술을 다물고 있는 꽃술. 그래도 붉은 희망이 새봄과 함께 현관문을 슬며시 노크하며 지나간다.

우수 지난 봄비가 왔다 갔다 사람의 마음을 살랑살랑 움직인다. 갑진년 새해 입춘 우수를 지나 주말이면 보름이다. 정월 대보름달을 맞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춘래불사춘, 봄바람이 부는 듯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직은 두 뺨을 시리게 한다.

쉽게 오지 않는 봄, 어디 세상일이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있겠는가. 현관 앞 모란도 몇 차례의 몸살을 겪으면서 붉은 꽃술을 펴리라.

이럴 때 생각나는 시가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김영랑, 학창 시절 현대시를 공부하며 익혔던 시문학파의 한 사람. 그리도 외웠던 낭만주의, 목적주의, 순수시파, 주지시파, 생명파, 청록파. 암울한 1920년대를 지나 1940년대까지의 낭, 목, 순, 주, 생, 청파를 줄줄 외웠던 그 시절 그 가락이 이제는 세월 속 추억이 되어버렸다. 모든 경계는 허물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시기를 거치며 해체와 융합을 거듭,  AI시대가 현관 앞 모란 꽃술을 쭉 훑어가는 느낌이다.

현관을 나서면 가로등 속에 숨어 있는  카메라는 늘 나를 따라다니고 봄날 상큼한 향기를 풍기며 다가오는 봄내음 마저 나를 경계한다. "늘 깨어 있어라". 성경 한 구절을 되뇌며 거닐어 가는 내 모습이 AI시대에 내 아닌 내가 로봇 되어 걸어가는 느낌이다. 굳이  AI 같은 무슨 칩이 아닐지라도 내 몸과 머리는 이미 내 의지와는 다르게 스스로를 경계하며  무표정한 사이보그가 되어 있다. 사람냄새를 풍기면 풍길수록 더욱 멀어져 가는 무표정한 거리, 오로지 군말 없이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만사(萬事)가 여일(如一) 하다.

춘래불사춘, 봄바람이 맞는지 믿을 수 없는 모란 꽃술이 내 마음이다. 사람의 손, 사람의 마음이 그리워지는 모란. 꽃술 머금은 모란이 무표정하니 내 마음도 무정(無情)이라. 겨우내 움츠렸던 꽃대 하나가 유난히도 온몸을 비틀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영랑이 지나갔던 모란에는 그래도 사람이 있고 사람의 향기가 있었다. 영랑은 시문학파의 중심인물, 1930년 일제 치하의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김영랑 이들을 일러 시문학파라 칭하며, 이들은 1930년 3월 시 전문지 <시문학>을 창간한다.

일제치하의 순수지향, 모란은 일체의 이념과 사상의 지배를 벗어나야 꽃을 피울 수 있다. 대체로 일제 강점기가 영랑의 삶의 배경이고 보면 영랑은 한밤 내 서럽게 눈물을 흘렸으리라. 가슴을 타고 흐르는 눈물, 시문학파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순수 눈물, 순수 미의식 지향이다. 오월 어느 날 후다닥 피고 지는 모란꽃에 사상과 이념이 깃들 시간이 없다. 경쾌하고도 리듬성 짙게 우리말의 조탁(彫琢)에 심혈을 기울인 그들의 노래는 어쩌면 아픈 시대를 짐 진 시심(詩心)의 역설인지도 모른다. 카프를 거부한 순수를 향한 몸부림, 우리는 당시 유행하든 문예사조의 일단인 유미주의와 탐미주의란 미의식을 이 시기에 맛보게 된다.

모순된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의식, 그들의 삶도 의식도 모순일 수밖에 없는 아니 모순이어야 찬란할 수 있는 시대적 정황, 꽃그늘이 진 영랑의 의식세계, '찬란한 슬픔의 봄'은 이렇게 생긴 시어인 것만 같다.  이 모순된 시어를 머금은 현관 앞 모란, 꽃가지 하나하나에 그늘은 있지만 사람의 향기는 없다.

아직 봄바람이 생각보다 싸늘하다. 모란이 피었다 지면 이미 봄은 가고 내 마음 내 사랑도 간다. 기다림과 이별, 희망과 좌절,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 인연. 모란과 나는 삼십 년을 넘게 같이 살아왔다. 모란이 모순된 삶이라면 내 인생도 부지불식(不知不識) 모란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춘래불사춘, 정월 대보름 지나 먼 산 아지랑이  '윤사월'이 오면 사람 향기 가득한 송홧가루를 머금고 싶다.

김난도가 말하는 '휴먼터치'가 못내 아쉬운 그런 시대, 현관 앞 모란은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잔인한 봄,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202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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