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영국사(寧國寺) 고목, 인간 노거수를 생각하다]
어느 사찰이든 은행나무는 있다. 해충방지용이라고 들었다. 해충도 해충이지만 인간벌레도 걸러 주는 자정능력이 있단다. 천년을 견디어 온 노거수 앞에서 겸손해지는 이유가 따로 없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정 설법이 그래서 나온 것 같다. 영국사 고목, 노거수 앞에서 잠시 인간 노거수를 생각해 보았다.
봄바람과 함께 영국사를 향했다. 영국사는 삼국시대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충북 영동군 천태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이 이 절로 피신하여 국태민안 기도를 올렸다는 곳. 난이 평정되자 공민왕은 국청사(國淸寺)로 불렸던 사찰을 영국사(寧國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길게 드러누운 흙길이 자비의 보살인양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른 봄꽃들은 수인사를 건넸다.
모처럼 여유롭게 걸어보는 산사로 가는 길, 나는 몇 번이고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보았다. 부처님을 향한 길이라 생각하니 경건한 생각이 들었다.산사의 입구는 자연 그대로다. 몇 굽이돌아 약간은 휘어진 돌계단을 마지막으로 올라서니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하늘을 받치고 있다. 떠받친 하늘이 힘겨운 듯 흰 몸 흰 가지엔 수액이 말라 보였다. 제 몸 하나도 짐 지기 힘겨운데 하늘을 받치고 있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겠는가. 힘겨운 가지들이 축 늘어져 있다. 뿐만이 아니다. 굵고도 깊게 파인 주름을 몇 겹으로 접은 가슴팍엔 큰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암덩어리 하나 짐 지고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노거수 앞에 잠시 머리를 조아렸다. 미련한 중생, 무엇을 바라 이리도 모진 목숨을 이토록 이어놓은 것일까. 정녕 나라를 걱정하고 나름의 복을 바라는 중생이란 이토록 한심한 영물이런가. 두 팔 벌려 온갖 더러운 찌꺼기를 털어내기도 이젠 힘겹다. 물러가라. 인간 아닌 인간은 물러가라. 너희들이 부처님을 뵈옵기란 청정무심이어야 하는 것. 내 몸이 무겁고 힘들게 보일지라도 내 앞에서 육신의 허물을 털고 들어가야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내 비록 타고난 운명을 어이 할 바 없어 크나큰 부처님을 모시기로 천년을 버티어 왔건만 이제는 한숨 몰아쉬기조차 힘겹구나.
가만히 보아하니 천년 세월 흘러도 너희들의 몸에 덧난 잡티는 변함이 없구나. 타고난 업이란 무시로 털어내야 하거늘 무엇이 그리 좋아 희희낙락 먼 길 와서 나를 희롱하느냐.돌이켜보면 난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내 몸은 천지, 동서팔방 어느 곳 하나 빈틈이 없었다. 원나라 말기, 극도로 민심이 피폐해지고 물가는 폭등하여 머리에 붉은 띠를 하고 우리를 괴롭힌 원흉, 홍건적. 민초들을 향한 수탈이 극에 치닫고 그 와중에 왕도 피치 못할 운명으로 나를 찾아 저기 저 본당 부처님의 원력을 빌고 빌었던 모습.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난세를 불력으로 극복한 공민왕, 그는 난을 평정하고 온갖 개혁을 통해 다시 고려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날밤을 기도했던 사람. 어릴 적부터 원나라에서 살다가 노국공주와 결혼, 이후 고려로 돌아와 원을 경계, 소위 자주국방을 외치며 변발을 거부하고 그녀와 함께 굳건한 나라를 위해 개혁을 했던 사람. 하지만 그리도 믿고 사랑했던 아내가 죽자 혼미해진 정신, 그래도 신돈과 함께 개혁을 했지만 결국 신하의 칼에 죽고 마는 비운의 왕. 그는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이 아니었던가.
중생 구제, 국태민안, 불법수호란 그저 그냥 행해지는 것이 아녀. 내 가슴에 틀어박힌 무거운 돌덩이를 두 눈으로 보거라. 이 무거운 원업이 언젠가는 바람 되어 다시금 흩날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그래도 본당 부처님을 지켜야 하는 것. 죽어나 사나 이 업이 내가 타고난 운명이란 말일세. 하지만 이제 나도 지친 몸, 불력 하나로 불법을 지켜 왔건만 더 없는 미련으로 서방정토를 꿈꾸고 싶으니 결단코 허물대로 허물어진 내 육신을 더 이상은 욕 되게 하지 말아 다오. 산 것이 죽은 것이요, 죽은 것이 산 것임을 법문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제발이지 이제 더 이상은 내 가슴에 돌을 박지 말아라.
내가 보기에도 아직은 떡 하니 본당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 동서팔방 굵은 가지는 영락없는 사천왕이다. 금방이라도 가슴팍 돌덩이로 빗나간 중생을 내리 칠 것만 같은 전율, 일주문과 사천왕이 없는 본당 본절을 동서남북으로 뻗은 칼자루 손에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경건해질 수밖에 없는 것. 비록 힘겹게 버티고 있는 몸이지만 천년 노거수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천태산 자락, 그리 높지 않은 석탑을 돌아보며 본당 부처님을 향했다. 잠시 묵상과 함께 배례를 올리며 노거수를 다시금 새겼다. 부처님의 미소가 가슴을 파고든다. 훌러덩 내 몸 던져 천년 세월 함께 해온 노거수 덕분이런가. 부처님의 여유로운 모습에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본당을 지키고 있는 온화하고도 자애로운 문수, 보현보살이여, 이제는 극락왕생, 헐떡이는 이 수호신을 제 명대로 임하게 하소서. 가슴팍 흰 돌, 천년을 내리 이어온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나이다.
석탑을 돌고 돌아 돌아서는 길에 나는 노거수의 안녕을 빌며 난세를 짐 질 인간 노거수를 기대해 본다. 한 점 흰구름이 봄바람을 입에 물고 하늘을 날고 있다. 영국사 고목, 이는 난세를 스스로 짐 진 수문장이어라.(20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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