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기도, 세렌디피티]
기도는 사람을 순진하게 만들어버리는 영적 힘을 가지고 있다. 허접한 나이에 묵주기도로 하루를 열고 닫는다. 꿈같은 인생길, 그래도 기도는 늘 나를 이해하고 받아준다.
긴 의자에 기대어 1959년에 개봉된 미국의 드라마 영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파계’를 보며 잠이 들었다. 진정한 복종을 향한 갈등이 결국은 수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종군 간호사가 되어 떠나겠다는 장면을 희미하게 바라보면서 잠이 들었다.
진정한 복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자신을 위한 아니 절대자를 향한 사랑, 믿음, 기도......부지불식(不知不識), 온몸 전율을 타고 흐른 짜릿함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오른손을 꼭 잡고 온몸에 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이것이 뭐지란 생각을 하며 잠시 그녀의 손에 몸을 맡기며 나는 포근한 전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짓누르는 듯 내 몸 안의 피가 솟구치는 이 느낌, 뜻하지 않은 우연히 주는 이 열락, 가브리엘이 영화 속 수녀 루크로 거듭날 때까지 그녀의 손이 내 안에 들어와 양극과 음극이 되어 굽이치는 세렌디피티는 꿈을 이어 깊은 밤, 잠자리로 이어졌다.
참으로 신기하다. 꿈같은 이야기다. 아니 꿈이었다. 밥을 같이 먹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양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주었다. 그녀는 식사 도중에도 나를 향해 나의 두 주먹을 그녀의 양손에 부딪치게 했다. 그러면서 스치는 말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분명 그녀가 했지만 무슨 알 수 없는 영적인 힘에 의해 흘러나오는 주문으로 다가왔다.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잠을 뒤척인 지도 몇 개월째다. 통증의학과를 찾아 주사를 맞고서는 피부 발진으로 또 다른 이차 치료를 했던 어깨 통증이 자고 일어나니 사라진 듯 가볍다. 믿을 수 없는 영적 아우라가 밤을 이어 꿈속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폐렴을 극복하고 당당히 종군 간호사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오전 아홉 시를 훨씬 넘기고 있었다. 꿈이 아침을 반쯤은 삼켜 버렸다고나 할까.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똬리를 틀며 깊은 우울로 이어지는 밤을 생각하면 시나브로 얼굴 속 깊게 파인 주름을 루크는 익히 알고 있을 법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 줌 나를 향한 측은지심이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한지도 모른다. 온 힘을 다해 솟구치는 전율, 부드럽고도 매섭게 다가온 그녀의 손길, 적어도 그것은 나에게 알 수 없는 꿈속 힘이 되어 그토록 아팠던 어깨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영화를 보면서도 성모송과 함께 한 기도, 세렌디피티, 영적 아우라란 이런 것일까.
언젠가 간염으로 고생했던 그래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죽음 직전에 갔던 동료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잠결에 호리병을 든 마리아를 보고서는 지금까지 간염의 수치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뜬금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이러한 사실을 간증으로 고백했고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눈이 반쯤은 열려 있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기적이나 영적 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쩌다 그와 등산을 같이 하면 그의 몸이 그렇게 가볍게 보일 수가 없었다. 살아 있음이 기쁨이고 그 기쁨이 공중부양되어 그의 몸은 늘 하늘 가까이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듯하다. 그날 이후 다시 살아난 그는 성모 마리아의 군단이 되어 오늘도 레지오 활동에 여념이 없다. 폐병 환자를 돌보다 폐병에 걸린 가브리엘이 겹친다.
영화를 보다 잠결에 마주친 세렌디피티, 기도로 잠들고 기도로 새벽을 맞이한 지가 벌써 몇 해를 넘기고 있다. 찬란한 파계, 가브리엘을 또 만나고 싶다.(202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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