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그래도 줄기세포는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줄기세포만이 아니다. 오늘 하루 괴롭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내일이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내일이 안겨 주는 신화와 전설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구는 멸망했을 것이다. 오늘이 가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일에 대한 기대, 그것은 오늘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희망인 신화와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엔 신화나 전설 따윈 없다. 다만 이미 죽어버린 무성하고도 재미없는 이야기들만 있을 뿐이다.
사라져 버린 신화와 전설, 그래도 내 어린 시절 그때는 적어도 아니었다. 메뚜기 다리를 자근자근 씹으며 이어가시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었다.
“옛날 어느 고을에 한 할머니가 뒤늦게 애기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더니 이내 이 마을 저 마을을 날아다녔단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것이 글쎄 일주일을 조금 더 지나자 키가 한 자 육 척이나 되었지 뭐야.”
어머니는 두 눈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우리들 때문인지 신이 나신 모양이었다. 메뚜기 다리를 장만하시던 어머님이 벌떡 일어나 하늘을 날아다니던 아기장수의 흉내를 내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우리들의 꿈은 하늘을 날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꼬리를 쳤다.
재미있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태어 난 지 일주일 만에 키가 한 자하고도 육 척이라니. 한 자 육 척의 키가 얼마 인지도 모르면서 어머니의 양팔을 따라 하늘을 날던 꿈의 이야기가 아닌가.
“힘센 애기를 낳은 할머니는 덜컹 겁이 났단다. 이 애가 다 자라면 장차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거야. 그래서 할머니는 소문이 나기 전에 아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이리저리 궁리 끝에 애기를 볏짚 쌓아 둔 곳으로 끌고 갔지. 키가 2 미터 가까운 것을 엄마가 어찌 들겠어. 겨우 볏짚으로 덮고서는 그대로 "으악", 찔러버린 것이지. 피는 하늘로 치솟고 그렇게 애기장수는 죽고 말았단다.”
아기장수의 탄생, 그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방바닥을 치며 깔깔거렸던 이야기를 꿈으로 먹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이야기는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입술 따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동심이 피를 흘리며 날아가는 천사가 될 즈음 어머니는 마무리를 이렇게 지으셨다.
“피가 하늘로 튕기며 갑자기 뭉개 구름이 일더니 하늘에서 용 같은 말이 내려오기 시작한 거야. 놀란 할머니는 이렇게 벌렁 자빠진 거지. "
우리는 심각했다. 이야기를 끌고 가던 어머니의 입술이 갑자기 좌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성영화의 변사라고나 할까. 굵고 가는 목소리는 때론 천둥과 번개가 되었고 두 팔 벌린 모습은 악마와 천사가 되어 어린 우리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배우도 이런 배우가 없었다. 그야말로 자연산 배우요 광대가 아니었던가.
피투성이가 된 죽기 직전의 아들, 키가 한 자 육 척, 태어난 지 갓 일주일, 이 아기장수가 말을 하며 뒤로 쓰러지는 어머니를 쓸어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꿈은 이렇게 커갔고 신화와 전설은 골방 이야기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
"두 팔 벌리고 어머니를 안고 죽기 직전에 애기장수는 어머니를 향해 콩 닷 섬과 팥 한 말을 함께 묻어 달라고 말을 남기지."
어머니는 신이 났고 우리들 모가지는 길게 뻗어 있었다. "어기여차, 엉기조차, 벙기조차, 수리수리 마수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한바탕 어머니의 춤사위는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천사였다.
"애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급기야 할머니의 짐작대로 애기를 죽이려고 관군들이 칼을 들고 나타났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함께 묻은 콩은 말이 되고 군사가 되어 있었단다. 그리고는 애기장수를 구할 용과 말이 하늘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왔단다. 하지만 애기장수가 죽은 것을 보자 용마는 피를 토하며 못에 빠져 죽고 말았어.”
목젖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우리들은 웃고 울었고 어머니는 다시 메뚜기 다리를 정리하고 있었던 꿈의 이야기, 이 아기장수의 이야기에서 아직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신화와 전설이 없는 시대. 나는 무얼 바라 어린 시절 아기장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신화와 전설이 없는 시대, 시대는 이미 불가능이란 없는 AI 시대다. 한 시대를 짐 질 새로운 아기장수의 탄생을 막을 위정자나 관군도 없지만 아기장수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바보스러울 정도로 굳게 믿었던 전설의 줄기세포,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마지막 신화요 전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줄기세포가 되어 수많은 아기장수를 탄생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 여전히 해는 뜨고, 오늘을 이어 역사는 줄기차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20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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