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글을 쓴다. 글로써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경우는 보았어도 글이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만약 나에게 글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내 모습은 어떠했을까.
설날, 후다닥 열차에 몸을 던졌다. 설날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란 것은 착각이었다. 동대구역 대합실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모두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분명 민족의 명절인 설날은 흥겨워야 하는데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이 2024년 갑진년 설날 아침 내가 본 여행객들의 모습이다. 무거운 얼굴들을 보는 내 마음도 가라앉는다.
명절이면 꼭 가슴을 아리게 하는 두 분, 모정의 세월, 2014년 그해 어머니는 살아 계셨고, 나는 아버님의 유택 앞에서 두둥실 흘러가는 서녘 구름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는 그때 그 어머니도 가신지 벌써 5년 째다. 빛바랜 수필집을 꺼내 들고 두 분을 다시금 소환해 본다. 글 속에 내가 있고 두 분이 있다. 2024년 갑진년 설은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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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모정의 세월]
그리 넓지 않은 무덤가에 잔디가 새로 돋아나기 시작했다. 상석 없는 무덤이 초라하게 보였다. 햇수로 치자면 벌써 10여 년, 당신이 가고 난 이후 날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어머니는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로 지아비의 무덤을 한 바퀴 돌며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못난 사람, 젊어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더니.”
긴 한숨과 더불어 나오는 탄식, 눈가에 맺힌 어머니의 눈물을 나는 몇 번이고 훔쳐보았다. 한 점 구름이 두둥실 등성이를 넘어가고 허전한 들판을 두 마리 꿩이 가로질렀다. 부부의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너무도 큰 탓인지 이제는 잊힐만한 세월이 흘렀건만 당신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임종의 순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여기, 이것 펴고 술이나 한 잔 올려라.”
말씀은 그리 하셔도 매번 찾아오는 당신의 무덤 앞에 어머니는 늘 더 없는 정성으로 술잔을 마련한다. 흰 보자기를 깨끗이 닦아 그 위에 다시 비닐을 입힌 제기(祭器)에는 당신을 향한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정갈한 성격만큼이나 당신을 향한 사랑에는 한 점 티를 찾아볼 수 없다. 언제 보아도 아버지에 대한 정성은 살아생전 그 정성 그대로다.
아버지는 남자답게 우락부락하고 성질이 급했다. 성질이 급해서인지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얼마 붙어있지 않은 곱슬머리 몇 개가 텅 빈 이마를 뒤로 불안하게 매달려 있었다. 버럭 고함을 지를 땐 정수리에서 불꽃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붉은 열기가 맨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곱슬머리가 고집이 세다는 말처럼 적어도 나의 눈엔 아버님이 고집불통으로 비쳤다. 아버지에 비해 곱상하니 예쁜 얼굴의 어머니는 당신을 신(神)으로 생각이나 한 듯 그저 치받들며 말없이 믿고 의지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이른 봄이면 호미질을 시작했다. 무덤 앞 흙으로 일군 몇 평 되지 않는 텃밭이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오늘도 어머니는 연신 호미질이다.
“야야, 여기에 볍씨를 심으면 이삭이라도 패겠나? 밭도 아니고 논도 아닌 돌 많은 이 콩밭에 그래도 이삭은 패겠지?”
“몰라요, 벼는 논에 심어야 되는 것 아닙니꺼?”
어머니는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뻔히 알면서도 시름 삼아 물었다.
‘볍씨를 심는다.’ 그저 신이 나신 모양이다.
“너거, 큰엄마가 이거 한 번 심어 보라 카더라. 그라고 요즘 벼는 밭에 심어도 나락이 된다더라. 괜찮겠제?”
“그렇겠지예.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이삭이라도 나겠지요.”
대대로 이은 농군의 딸이라 어머니의 호미질은 세련되어 보였다. 애써 지아비를 잃은 서러움을 달래려는지 묵묵히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열심히 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연신 허리를 굽히며 땅을 헤집는 어머니의 손목에서 그 옛날 그 세월이 뚝 뚝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희야, 이것 아직도 정미소에 안 보냈나. 이 사람이 미쳤나? 콱 죽여 버릴라.”
“그만 하이소, 고마. 오늘도 당신 찾는다고 왔다 갔다 안했닝교. 어디서 또 노름만 하고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늘 누나의 이름인 ‘진희’라 불렀고, 어머니를 향한 말투는 불만이 가득했었다. 그랬다. 아버님은 도박과 술을 즐겼다. 적어도 어린 내 눈엔 그렇게 비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취한 아버님은 밤이면 밤마다 이유 없이 어머니를 다그치곤 했다. 허름한 불빛 뒤로 아버님의 굵은 팔뚝에는 쌀방망이가 들려 있었고 어머니는 겁에 질려 소리를 마구 질렀다.
아버지는 무서웠다. 정말이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숨소리를 죽이던 나는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했다. 어머니는 후려치는 아버님의 매를 참다못해 바람 찬 겨울날 울면서 한둔했다. 이슥한 달밤, 어머니의 흐느낌은 이어지고, 우리 네 남매는 가슴을 졸이고 졸였다.
“누나야, 왜 우리 아부지와 엄마는 맨날 싸움만 하노?”
“나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가 자꾸 싸우면 나도 콱 죽어 버릴란다.”
누나도 분명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죽어 버릴까’. 적어도 우리는 거의 매일 싸움으로 밤낮을 이어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죽는지를 우린 몰랐다. 그저 울다 지치면 죽는 줄로만 알고 한밤을 소리 죽여 울기만 했다. ‘우당탕탕’, 한바탕 양동이가 날아가고 술 취한 아버님의 음성이 힘에 겨워 헐렁해질 때면 어린 두 동생의 눈가엔 언제나 눈물과 함께 공포의 잠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머니는 예쁘고 아버님은 잘 생겼는데 왜 거의 매일 싸움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참말로 더 이상한 것은 내일이면 당장이라도 집안이 박살 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우리는 이층 다락방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허리를 곧추 세우기조차 힘든 이층 다락방과 함께 천장과 바닥을 격한 일층은 어린 우리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두렵고도 힘든 두 분 만의 공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한 차례의 봄이 저만치 멀어져 간 여름, 이층 다락방엔 형광 불빛을 타고 매미보다 더 큰 나방이 날아들었다. 어쩌다 자리를 잘못 잡은 나방이 동생들의 이부자리를 파고들면 이층 다락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양철 지붕을 타고 쥐새끼들은 달리기를 하고 다락방 안에서는 한바탕 나방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하루살이와 같은 나방이 전등 불빛을 어지러이 돌다 곤두발질 치는 모습이 두 분의 싸움으로 깊이를 모르고 쳐 박히는 네 남매의 마음과 같았다.
밤이면 밤마다 나방이 날아드는 이층 다락방, 우리는 껍데기는 양철이요, 기둥은 나무로 되어 있는 쌀 고방인 이층 다락방에서 살았고, 어머니와 아버님은 쌀을 벽으로 한 일층 바닥에 만든 조그만 방에서 생활했다.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우리들의 방, 그래도 가끔은 장난기 어린 꿈과 낭만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짓궂게 익어가고 있었다. 천장 위로 쥐는 달리기를 하는데 우리는 즐거웠다. 갈라진 양철지붕의 틈새로 어린 남동생과 나는 머리를 쳐 박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즐겼다.
“형아, 조금만 더 앞으로 와라.”
어린 동생은 고무호스를 들고 옆집 고방 안에 쌓여 있는 가마니 위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나는 정신없이 물을 퍼오기에 바빴다. 고무호스의 한쪽을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넣고 다른 한쪽을 입으로 힘차게 빨면 물은 수압 차이로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같은 쌀장사를 하고 있는 이웃집 젊은 아줌마와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소리 높이 다툴 때면 왜 그리도 우린 이웃집 아줌마가 미웠던지. 쌀가마니는 몇 차례의 양동이물을 삼켰고 쌓아둔 시커먼 연탄이 폭삭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때면 겁 많은 누나는 눈알을 굴렸고, 눈 맑은 여동생은 배꼽을 잡고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곧 불어 닥칠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전혀 알지 못한 빗나간 동심, 끝내 우리는 천하의 몹쓸 자식들로 손가락질을 당하며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항시 쌀을 중간에 둔 이웃과의 전쟁, 그래도 어머니는 이웃집 아줌마의 눈을 피해 가며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기에 바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가끔씩 이웃집 연탄은 내려앉았고, 물 먹은 가마니는 우리를 웃음으로 반겼다.<모정의 세월 1부> (202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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