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수필산책: 배꽃 여인, 배꽃으로 거듭나다]
배꽃 김미숙 님의 세 번째 수필집 《한 곡의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 중에서 수필 <새봄>이다.
살다 보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고, 아무리 많이 가져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행복을 판가름할 수도 없다. 어떻게 마음을 수놓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오래전에 인연을 맺었던 언니의 삶이 그랬다.
그녀의 삶은 늘 봄날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떠들어도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여태껏 별 어려움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 여겼다. 언니의 남편은 대기업에 다녔고, 두 아들이 의대에 다녔으니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았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여고를 졸업하던 그해 결혼을 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신부가 되었다. 어릴 적 꿈이 현모양처였고, 자신의 삶을 빨리 갈무리하고 싶었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하고, 살림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가 만든 모든 음식은 입맛을 끌어당겼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은 가족들이 외식 한 번 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수십 년간 알뜰하게 모았던 재산을 한방에 말렸다. 그 금액은 어마하게 컸다. 집 두 채 값이 넘었고, 거기다가 은행에 대출까지 받은 터라 그간의 부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손쓸 방법도 해결 방법도 없었다.
수년 전 그녀는 J에게 적은 액수의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보이차를 함께 나누었던 지인이었다. J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성실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문만 믿고 은행 이자의 몇 배를 주겠다는 말에 의심 없이 넘어갔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약속했던 이자가 들어오자 안심이 되었다.
한 달 두 달, 일 년이 가고 삼 년이 지나도 J는 하루도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다. 통장에는 동그라미의 숫자가 켜져 갔다. 돈이 두둑 해졌고, 배짱도 늘어났다. 남편 모르게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알뜰하게 살림하면서 모은 푼돈과 빌려주고 받은 이자와 집까지 은행에 담보를 잡아서 빌린 돈을 몽땅 J에게 송금시켰다.
한 달 들어오는 이자가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의 월급만큼 들어왔다. 어느 날 마주한 그녀에게 이제 그만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던졌다. 그녀도 걱정이 되었던지 그래야겠다고 했는데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J가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산을 빼돌린 그를 수소문했지만 헛수고였다. 남편이 모르는 돈만 날렸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터였다. 높은 이자를 받는다고 집까지 담보로 빌려줬으니 풍비박산이 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칼부림 날 정도로 싸웠고, 이혼 얘기까지 나왔다.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들었지만 맥없이 풀린 남편의 술주정도 참아내야 했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욕심이 한순간의 허망함으로 요동쳤다.
그녀는 허름한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몇 년 동안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다. 바깥세상 구경한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계절이 몇 번이나 갔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그녀 집으로 찾아갔다. 홀로 방안에 있던 그녀는 나를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집안에 누워만 있지 말고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러 가자고 꼬드겨도 미동도 하지 않던 그녀였다.
이듬해 봄날이었다. 축 늘어져있던 그녀가 훌훌 털고 일어났다. 베란다에 버려져 있던 화분 때문이었다. 죽은 듯 서 있던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꽃이 핀 것을 보고는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나고 사람 났냐?'
컵에 가득 담긴 찬물을 단숨에 마시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초로의 여인이 된 그녀는 새로운 인생 설계를 했다. 친구가 수십 년째 봉사한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을 쓰지 못하는 노인들의 한 끼를 먹이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가족만을 위하는 삶도 아름답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자신의 손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길은 평판대로와 비탈길, 꽃밭과 가씨밭길이 공존한다. 자기 인생의 악보에 새로운 이름을 불어넣은 지금,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롭게 시작한 삶에 희망의 빛이 조금은 보이는 듯하다.
풍요로웠던 삶은 사라졌지만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 그녀는 온통 꽃망울이 터져서 꽃들이 만발하는 새봄을 맞고 있다. [수필: 새봄, 수필집, 한 곡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수필세계사, 김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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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개인 수필집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다들 나름의 의미 있는 작품들이라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두기가 아쉬워 틈 날 때마다 한 권씩 감상해 본다. 좋은 책을 주신 작가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수필 <새봄>은 '배꽃사랑'의 메타포, 작가의 온유한 마음이요 사랑이다.
작가는 예명을 '배꽃'으로 쓰고 있다. 배꽃은 봄에 핀다. 한자어로 말하면 이화이니 이화 하면 고려시대 이조년의 시조가 저절로 나온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귀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내친김에 한 수 읊어 보았다. 작가의 삶, '다정도 병'인 것은 바로 그녀의 '배꽃사랑'이다.
배꽃 김미숙은 배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유실수를 수출하고 있는 그녀의 삶은 소위 부농이다. 세 권의 수필집 《배꽃 피고 지고》(2011),《나는 농부다 》(2014), 2023《한 곡의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를 출간했다. 세 권의 수필집, 표제만 보더라도 '배꽃여인'임을 알 수 있다. 배꽃은 봄에 피고 매화와 더불어 봄을 상징하는 꽃이다. 눈 속 매화가 봄을 알린다면 배꽃의 만개는 축복의 메시지를 던진다.
풍성한 생명의 꽃, 희망의 꽃인 배꽃을 생각하면 작가의 삶도 그렇다. 피상적으로 보이는 삶의 모습이 아니라 글 속에 푹익은 그러면서도 달콤한 배즙 같은 삶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래서 세 편의 수필이 지배하는 단어는 배꽃을 핵으로 '봄'이란 단어다. 작가의 삶은 늘 봄이다. 봄에 씨를 뿌리고 한여름을 지나 가을에는 풍성한 추수를 마무리하고 겨울이면 다가오는 봄을 위해 모든 것을 접고 해외여행을 즐긴다. 20여 년을 훌쩍 넘겨버린 부농이고 보니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스페인을 지나 페루의 바예스타 섬까지 오고 간다. 그것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바예스타 섬에서 새들의 배설물로 만든 비료가 오늘날 부농의 밑거름이 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닫는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배꽃을 즐기며 살아온 배꽃인생이 여유롭고 향기롭다. 배꽃 같은 화사한 모습도 그렇지만 마음 또한 일지춘심이라 그녀의 마음은 늘 봄이다. 수필 <새봄>에서는 이자놀음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주변 언니의 삶을 기어이 봄으로 돌려놓는다.
작가를 생각하면 '순백, 순수, 생기, 여유'란 단어를 빼놓을 수없다. 배꽃 인생, 작가의 배밭이 해가 갈수록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문필 또한 빛나길 기원해 본다.(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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