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도토리묵을 생각하다 ]
묵을 먹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묵에도 종류가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묵은 도토리묵이다. 특히나 젤리 같은 가을색의 도토리묵은 때깔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냥 천천히 씹어도 제맛이지만 여기에 참기름과 참깨를 넣어 비벼 놓은 간장과 함께 먹을 때의 그 맛이란 한 마디로 제대로 된 묵맛이다. 또 달리 이런저런 고명으로 만든 묵채는 한여름 열기를 말아버리는 최고의 여름별미로 거듭나기도 한다.
나는 이런 묵을 즐겨 먹지도 않았고 묵채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식당에서 찬거리로 나올 때도 손이 가지 않았다. 이처럼 나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묵이었지만 이 가을에 나는 묵에 푹 빠졌다. 마음 고운 사람으로부터 정성으로 만든 묵 한 두 모를 얻어 먹고부터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도토리를 주어 직접 만든 묵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정성 못지않게 묵에 스며 있는 가을향기에 취했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묵을 먹다 보면 가을냄새가 난다. 누구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좋아 가을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나는 묵보다 묵에 스며 있는 가을향기가 좋다. 가을에 먹는 묵은 묵이 아니라 가을이라고나 할까.
가을을 먹다니, 생각해도 낭만적이다. 도토리묵, 묵에는 도토리의 아픔이 있다. 한여름 까맣게 타들어간 몸이 시월이 오기 전에 온몸을 던진다. 툭 떨어진 몸은 통째로 다람쥐 등 뭇 짐승의 겨울나기 먹이가 된다. 뿐만이 아니라 온몸 가루가 되어 묵과 묵채로 때론 일용할 양식이 되기도 한다. 온몸 가루가 되는 헌신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본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작은 몸과 몸이 가루 되어 넉넉한 가을향기를 풍기는 토토리의 헌신과 사랑을 나는 경외한다.
도토리묵, 온몸 가루가 된 묵 속에는 만든 이의 정성과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 까맣게 타버린 도토리의 헌신적인 가을향이 있다. 커피 향이 좋아 커피를 마시듯 묵에 스민 가을향이 좋아 나는 묵을 먹는다. 도토리의 일생, 그 헌신과 사랑을 생각하면 묵은 그냥 묵이 아니다. 가을향 가득한 하늘 같은 거룩한 사랑이다.(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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