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먹물 한 점이]

백두산백송 2023. 10. 2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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展大名法書 草書 孫過庭 書譜

[명상수필: 먹물 한 점이]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지만 붓글씨만큼 나에게 어려운 것도 없다. 쓰면 쓸수록 틀이 잡혀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괴발개발이다. 그래도 어쩌랴. 타고난 난필을.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그냥 쓰자. 그리고 즐기자.

문방사우, 비록 글씨엔 손방이지만 나만의 난필(亂筆)을 가까이하는 네 벗은 이름하여 지(紙), 필(筆), 묵(墨), 연(硯)이니 종이는 '나만의 대지'요, '붓'은 '내 마음'이요, 먹은 '마르지 않는 열정'이며, 벼루는 '내 마음의 텃밭'이라.

돌이켜 보면 선친(先親)은 명필이셨다. 나는 그것이 늘 부러웠다. 지금도 서랍에는 고인의 말씀이 담긴 필체(筆體) 좋은 메모지가 들어 있다. 어쩌다 졸필에 속이 상할 땐 이를 꺼내보곤 한다. 정갈하고도 멋있는 글씨로 한자와 한글이 조화롭다.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안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거침없는 필치(筆致)에는 활달했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일필휘지(一筆揮之), 그 명필의 절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정성을 다해 그려본다. 재미있다. 손과정(孫過庭) 서보(書譜)를 펼치고 초서(草書)를 흉내 내 본다. 갈아 놓은 먹물을 푹푹 말아 마음의 끝을 쫓노라면 그 속에는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스쳐가고 시나브로 심연(深淵)에 빠져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글씨도 계절 따라 천태만상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에 겨운 봄날의 글씨에는 희망이 있고, 한여름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글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청명한 가을, 누렇게 익은 벼처럼 가을에 쓴 글씨에는 굵은 땀방울이 스며 있다. 겨울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독기가 스려 있는 듯 한껏 움츠린 글씨, 쭉쭉 길게 펼쳐보지만 자꾸 쪼그라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역시 괴발개발의 궤를 벗어날 수 없지만 자족 속 열락을 어이하나. 하나같이 서법(書法)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지만 그 속에는 내가 있고 내 아닌 나도 있다. 아마도 선친도 그러했으리라.

이렇듯 글도 내 마음 따라 사계절 괴발개발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사 계절이 내 마음이요, 내 서체인 것을. 무릇 서예란 붓을 든 이의  마음씨, 곧 그만의 필치(筆致)가 서법(書法)이요, 서체(書體)가 아닐는지. 오늘도 종이 위에 떨어지는 먹물 한 점이 내 마음 따라 흘러간다.(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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