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수필, '아나키스트적 발상'을 생각하다]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무주공산에 있음을 느낀다. 호흡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강렬한 엑소더스, 그녀가 남긴 강한 울림은 책을 덮은 이후에도 알 수 없는 열창의 메아리를 남긴다. 그것은 삶에의 강렬한 욕구,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강한 리비도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생의 애착으로 아니 생의 환희로 벅차오른다. '어서 오너라 나의 침실'로 '상화'도 가고 '혜린도 갔지만 삶에 대한 애착과 환희는 생존 자체의 뿌리를 흔든다.
《김병종 화첩기행 3》, <전혜린과 뮌헨>을 읽다 보면 이런 우수에 젖어 나도 모르게 한 잔 붉은 포도주로 목젖을 적시게 된다. 이럴 때 내 글에는 내가 없고 나도 없는 "아나키적 상황"에서 내 글은 허공을 맴돌고 있다. 글, 아니 수필이란 이래서 자유로운 발상의 덧셈과 뺄셈이 가능한 희한한 글이 되어 일상 속 무의미한 자아를 의미 있는 자아로 거듭나게 한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3>의 '전혜린과 뮌헨'을 읽으면서 나는 수필, ‘아나키스트(anarchist)적 발상'을 생각해 보았다.
-문학가이기 이전에 삶의 예술가였던 전혜린 -
<우수와 광기로 지핀 생의 불꽃>이란 글에서 김병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음과 불의 여자,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된 여자. 문학가이기 이전에 삶의 예술가였던 전혜린.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차갑고 또 불처럼 뜨겁게 살다 간 청춘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왜 뮌헨까지 오게 됐을까. 왜 베를린이 아니고 하필이면 뮌헨이었을까. 그녀가 머물던 이곳, 독일 땅에 와서 읽는 글들은 스무 살에 대했을 때처럼 몽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장 사이마다 뿜어져 나오는 그 에스프리의 강렬함만은 여전했다. 글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그녀의 문장은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책갈피 속의 낙엽처럼 바스러질 법도 한데 그녀의 글은 여전히 서늘한 기운과 고독, 도발과 광기로 불안하다. 화가의 낡은 스케치북을 들추듯 나는 그녀의 뮌헨 소묘집을 넘긴다.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젊은 날의 하루도 그렇게 넘겨졌다."<김병종 화첩기행 3.13p>
길은 언제나 위험하면서도 끝내는 안정으로 치닫는다. 구불구불 굽지 않은 길은 오히려 상처가 깊다. 그만큼 생각 없이 반듯하게 눕다 보면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마구 달린다. 하지만 몸을 뒤틀고 움츠린 구불구불한 길을 사람들은 내리 달리지 않는다. 사람도 길도 조심하기에 그리 상처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전혜린과 같은 구불구불한 굽은 길의 우수와 광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지름길 일수도 있다.
-일생에 한 번, 한 편이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간다.(...) 암흑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비가 그칠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긴다. 벽난로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독서로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하려고 책상 앞에 하염없이 앉았노라니 가슴에 와닿는 것은 절절한 고독감뿐.- <전혜린의 일기/김병종 화첩기행3.16p>
현대문학의 한 특징이 ‘아나키’에 있다고들 한다. 여기저기 이런저런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로부터 벗어난 ‘자유발상’, 그리고 이에 따른 '수필로서의 행복추구권'을 나는 수필에서의 ‘아나키즘’이라 부르고 싶다.
자신을 둘러싼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지향하는 수필가로서의 ‘아나키’, 수필가여 이를 향한 ‘아나키스트적 발상'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이것 또한 무의미한 자아를 의미 있는 자아로 거듭나게 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면서......(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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