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의 《섬》에는 1)<공(空)의 매혹> 2)<고양이 물루> 3) <케르켈렌 군도> 4)<행운의 섬들> 5)<부활의 섬> 6)<상상의 인도> 7)<사라져 버린 날들> 8)<보로매의 섬들> 이 실려 있다. 나는 순차적으로 읽기를 거부하고 2)<고양이 물루> 편을 먼저 맛보기로 했다. <고양이 물루에 관한 이야기>는 <전 4화>로 되어 있다. 오늘은 <제3.4화>를 감상해 본다.
♤고양이 물루:제3,4화
<제3화>와 <제4화>는 역전적 구성으로 하나의 서사다. 고양이 물루의 정체성은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된 <제1화>에서 <제4화>를 다 읽었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물루는 자연사가 아닌 안락사를 통해 집안 정원에 묻혔다. 절대적 사랑, 영원한 사랑으로서의 객체인 물루.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던 그는 끝내 눈에는 피가 맺히고 다리는 절뚝이며 몸뚱이에는 총알이 박힌 꼴로 돌아왔다. 그리곤 한쪽 눈마저 시력을 상실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물루의 아픔을 화자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물루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물루는 집안 정원을 좋아했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볼 때 제 <제1화>와 <제2화>는 물루에 대한 프롤로그요, <제3화>와 <제4화>는 에필로그다. 일탈은 늘 화를 초래한다. 며칠씩 외박을 하고 돌아다니니 결과는 뻔하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장 그르니에는 말한다. "집의 침묵, 작은 도시의 침묵, 그리고 자신을 여러 겹으로 싸고 있는 솜덩어리 속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그것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렇다. 그도 물루처럼 일탈을 꿈꾸었다. 집을 나가버린 물루의 일탈은 곧 자신의 일탈이다. 사람도 동물도 답답하면 뛰쳐나간다. 황홀한 일탈, 그것은 죽음의 서곡. 일탈과 함께 사랑의 판타지는 막장을 향해 치닫는다.
나도 동물을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랑이라기보다 학대에 가까웠다고 할 만하다. 한 때 나는 "쿤"이라 불리는 비글과 함께 했다. 쿤이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이 녀석을 거실에서 키웠는데 워낙 장난이 심해서 문갑 위의 물건을 보는 쪽쪽 엎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삼 개 월지나 마당 한편에 방을 마련해 주었는데 아니 이 녀석은 달만 뜨면 이상스러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귀여운데 사랑이 부족한지 아니면 무슨 사랑이 그리운지 그 목소리가 애절하고도 슬펐다.
집안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입양한 놈이지만 청성 맞게 울어대니 하는 수 없이 분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놈이 글쎄 갈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보내긴 보냈는데, 알고 보니 이놈도 내가 싫었던 모양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싫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모양이다. 사랑이 없는 동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때 확실히 깨달았다.
나와는 달리 장 그르니에는 고양이인 물루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한 것이 아니고 완벽한 소통을 하고 있다. 그는 물루가 가만히 땅에 엎드려 있는 모습도 좋아했다. 어쩌면 자연과 소통하고 있는 물루가 부러운지 모르겠다. 고독과 적막 속에 물루처럼 대지와의 근원적 소통을 화자는 목말라한지도 모르겠다. "무릇 짐승이란 자연 속에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쉽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장 그르니에,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 주요 작품으로 《섬》, 《알베르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일상적인 삶》 《지중해의 영감》,《모래톱》 등이 있다.
대지와의 소통을 통한 물루와의 교감, 절대적 믿음, 물루의 일생은 짧았지만 독자는 길게 한숨을 쉰다. 장 그르니에는 《섬》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던지고 싶었을까.
"이럭저럭 하여 낮일랑 지내 왔건만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일랑 또 어찌할 것인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고독과 운명, 묘지를 좋아했던 화자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그를 못 잊어 십자가 하나 걸어둔 조촐한 묘지에서 그의 체취를 맡 듯 꽃 향기에 미친다. 그리고는 사랑했던 이의 부활 인양 묘지 속에서 태어난 새끼 물루를 가슴에 품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근원적이고 병적인 고독과 상실감, 그것의 치유가 물루와의 교감이요 사랑이다. 물루와의 판타지, 이는 심리치유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러나 명약은 쓰다.
생뚱맞게 고려속요의 청산별곡 일절을 노래해 본다. 화자도 물루도 근원적인 고독을 피해 갈 수 없다. 하여 장 그르니에의 《섬》은 절대고독에서 피어나는 생의 아픔을 치유하는 재생의 공간이요, 부활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물루는 죽었다. 화자는 기약 없는 이사를 통해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랑의 판타지는 끝났다.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 모든 것이 운명이런가.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 또 "하나의 섬"이 심연(深淵)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다.(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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