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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조정래의 아리랑 리뷰 1권 제10화 《겨울 들녘》]

백두산백송 2023. 12. 2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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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제1부 아, 한반도]

<제10화:겨울 들녘>

요시다와 정재규 그리고 이동만이 <제10화>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정재규는 100원의 돈을 빌리려고 요시다에게 40마지기의 논을 담보로 했었다. 이 일로 낭패를 당한다. 교활한 요시다는 숙달된 고리대금업자다. 40마지기를 80마지기로 갚아야 하는 정재규. 꼴통 양반의 경제적 무능성이 그대로 노출된다.

치고 빠지고 물고 흔드는 데는 이골이 난 요시다. 그 곁에는 충견 이동만이 있다.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정재규의 신세는 겨울 참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보리고개를 앞둔 민초들은 참새 몰이를 즐긴다. 결국 재규도 참새도 잡아 먹힌다. 참새구이가 입맛을 당기 듯 만경 거부 정재규를 요시다는 꿀꺽 삼켜버릴 태세다.

얻어먹는 자의 얼굴에는 개기름이 줄줄 흐른다. 이동만, 그는 쉽게 변절해 버린 양반이다. 앞잡이의 속성은 무엇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들만의 변명이 절대 가치요 절대 선이다. 이동만의 가족은 삭막한 겨울들판과 달리 자식과  마누라의 얼굴에는 오동통 살이 붙어 있다.

<제10화>의 핵은 민초들의 삶이다. 겨울들녘은 언제나 삭막하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것이 부족한 자는 겨울이 되면 배가 더 고프다. 감골댁도 마찬가지다. 보름이, 정분이, 대근이를 보면 그 옛날 어린 시절, 겨울을 비비며 동장군을 피해 갔던 나의 추억이 마구잡이로 소환된다. 1950년 전쟁, 60년 대 복구, 70년 대 초반, 경부고속도로 건설 완공을 향한 노래들을  흥얼거렸던 시절. 그 시절 겨울들녘이나 지금 여기, 구한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민초들의 들녘이나 따지고 보면 오십 보 백보다.

"새벽종이 울렸네~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어린 시절 청소차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귀에 익었던 노래. 아직도 그 노래가 환청으로 다가오고  그 시절 국민동요 "퐁당퐁당"은 지금도 새벽잠을 들쑤시곤 한다. 이런 슬퍼고도 정감 어린 향수는 이순을 지나 고희를 바라보거나 팔순과  망구를 눈앞에 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향수요 눈물 어린 보람이다.

<제10화>를 읽으면서 슬픔보다는 아스라이 멀어져 간  어린 시절 쥐불놀이가 신명으로 다가온다. 감골댁 막내 대근이는 아직 11살이다. 세상천지 모르고 강가에서 멱을 감고 영글어 가는 불알을 신기하게 느낄 나이다. 나도 그 나이에는 그랬다. '땅따먹기', '가위 바위 보~', 그리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며 소리 질렀던 '댄지시~'.  판을 쥐어짜는 요시다의 얼굴이 살짝 스치며 통역을 맡은 이동만의 추잡한 얼굴이 거드름을 피운다. 그리고 그 곁에 사기를 당한 듯 멍하니 서 있는 정재규가 멍청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다. 짜인 판을 따라가듯 극적장면이 없는 <제10화>는 자연스럽게 민초들의 삶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거기에다 동심을 자극하듯 꼬물꼬물 커가는 대근이의 고추에 자꾸 관심이 간다. 재미있다.

삭막한 겨울들녘, 열한 살짜리 감골댁의 막내아들 대근이도 여러 아이들과 함께 쥐불놀이를 즐긴다. 세시풍속, 11살이 되는 대근이는 불길 속을 11번  뛰어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부스럼도 안 나고 학질도 안 걸리고 고뿔도 안 걸리고 꼬치도 제대로 영글어진다. 아프리카 오지 마을 추장의 얼굴이 스치고 양은냄비로 장단을 맞추는 사물놀이패가 눈앞을 스친다. 시기는 달랐지만 나도 대근이 만한 나이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 추억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한 차례의 봄이 저만치 멀어져 간 여름, 이층 다락방엔 형광 불빛을 타고 매미보다 더 큰 나방이 날아들었다. 어지럽게 춤을 추던 나방들이 동생들의 이부자리를  파고들면 이층 다락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다. 양철 지붕을 타고 쥐새끼들은 달리기를 하고 다락방 안에서는 한바탕 나방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밤이면 밤마다 나방이 날아드는 이층 다락방. 껍데기는 양철이요, 기둥은 나무로 되어 있는 쌀고방인 이층 다락방에서 우리는 허리를 굽혀야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쌀을 벽으로 한 일층 바닥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우리들의 방, 그래도 가끔은 장난기 어린 꿈과 낭만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짓궂게 익어가고 있었다. 천장 위로 쥐는 달리기를 하는데 그래도 우린 즐거웠다.

한판 추억과 대근이의 영상이 사라져 가는 사이 요시다의 얼굴이 간교하게 웃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고리대금 업자는 늘 있는 것 같다. 요시다가 그런  놈이다.  만경들판을 가진 재력가 정재규가 요시다의 작전에 말렸다. 논밭을 담보로 20원을 빌렸지만 변제할 날짜에 자리를 피하는 요시다. 충실한 이동만은 요시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다.

상황은 끝났다. 군산 긴 겨울들녘에 다시 참새때들이 날아든다.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 <이성부의 벼>를 <제10화>를 위한 헌시로 받쳐본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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