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제 사라마구(정영목 옮김)가 쓴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그는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환상적 리얼리즘 안에서도 개인과 역사,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며 우화적 비유와 신랄한 풍자, 경계 없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 왔다."라고 정영목 교수가 소개하고 있다.
긴 이야기지만 찝찝하게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끈적끈적한 이야기들이라 맹물을 마시며 읽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먼 자들'이 되고 나만 눈을 뜨고 바라본다면 상황이 이와 다를까. 이 소설은 프리즘을 안팎으로 밀고 당기며 인간의 심리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길게 이어지는 묵시록 같은 느낌으로 장면 하나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침밥을 먹다가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 읽고 나니 머리가 '백색의 도시'로 변했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며 두목의 목을 찔렀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양심과 윤리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피로 물들고 있었다. 죽어라. 방을 미끼로 수용소 여성환자들에게 집단적 폭력을, 폭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끔찍하다.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니 남자가 자행할 수 있는 최악의 범행은 내가 알고 있는 인간적 윤리와 도덕을 통째로 삼키고도 남는다. 그의 목을 타고 흐르는 끈적끈적한 비도덕과 비윤리가 21세기를 가로지르는 윤리의식의 한 단면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물론 '아포칼립스 (apocalypse)'적 상황 속에서 자행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지만......
한 세기를 앞질러 바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로는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지구종말적 자해의 도덕과 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읽는 내내 머리가 하얗게 변해갔고 가슴은 답답했다. '백색의 도시', 세상천지가 하얗게 보이는 역병을 그녀만은 피해 갔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의사 부인인 그녀의 눈을 통해 펼쳐지는 극한의 상황이 그려내는 생존의 무늬가 끔찍하다 못해 과히 절망적이다. 모두가 병들어 눈을 감고 자행되는 행위, 이는 처절하고도 무섭게 한 세기의 종말을 고하고 또 다른 세계를 예고하는 '세기적 묵시록'이 아니고 무엇이랴.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사라마구가 토해내는 긴 한숨을 따라가기가 힘겹고 벅차지만 나는 끝내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려내는 암흑의 절정을 넘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책 속은 '하얀 백색'이 지배하고 있는데 세로로 누워 있는 내 방안은 '까맣게'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흑백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지만 실은 내가 숨을 죽이는 불안과 공포의 부피나 두께는 비슷하다.
잠시 방문을 열고 나오니 거실은 일그러진 햇살로 백색의 형광을 먹고 있다. 나는 공포에 질려 하얀 마스크를 입에 물었다. 폐부 깊숙이 찔러대는 코로나로 끈적끈적한 콧물이 마스크를 성가시게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포로 집단 수용소에 격리되어 있는 '눈먼 자들'과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나마 코로나 극복을 위한 고깃덩어리를 눈으로 보며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점이다. 살기 위해 똑 같이 밥을 먹고 있지만 그들이 한 끼 밥을 먹기 위해서는 아포칼립스, 여자는 아래위로 피를 토하는 위안부가 되어야 하고 남자들은 거대한 공포를 지배하는 총구 속을 밥통인 양 헤집고 들어가야만 한다. 상황이 어떠하든 오로지 한 줌 밥을 먹어야만 너와 나는 생존이 가능하다.
세상천지가 하얗게 변해버린 백색의 공포. 한 세기를 앞질러 바로본 사라마구의 혜안이 시리도록 무섭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 이 극한의 상황은 우리 모두가 숨을 쉴 수 없는 코로나의 상황으로 돌려놓으면 상황은 오십 보 백보다. 함께 하는 세상인 것 같지만 우리네 삶이란 코로나 이후 철저히 고립되어가고 있는 느낌. 집단적 공포가 주는 생존의 절대적 철칙은 철저히 고립되어야만 하는 것. 눈먼 자들의 도시 속처럼 도덕과 윤리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 찾는 인간들의 미덕 정도로 치부해도 될 일이다.
보라. 집단으로 죽어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 그 속에는 윤리도 인간도 없다. 서로 치고 빠지고 먹고 먹히는 극단의 보상심리, 유일하게 눈을 뜨고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 그 눈빛이 던지는 아우라. 이 전율과 공포, 눈에 보이는 것 하나없는 처절하고 거대한 음직임, 암흑 속에서 펼쳐지는 내밀한 언어와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교감이란 세기적 종말의 잠언이 아니고서는 답이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 이미 병들어 버린 백색의 도시는 우리들 곁으로 깊숙이 파고든 것은 아닌지.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가 보여 주고자 하는 새로운 이데아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 극단의 카오스를 지나 이 시대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묵시록적 성격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그래도 지구는 어제에서 오늘로 여전히 자전과 공존을 이어가고 모두가 죽을 것만 같았던 코로나도 상처를 안은 채 주춤하고 있다.
인간멸종, 지구의 종말은 곧 올 것 같지는 주어진 세계는 스스로의 치유와 자정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후속편 '눈뜬 자들의 도시'가 머리맡을 지키고 있다. 또 다른 세계가 사뭇 궁금하게 다가온다. 외람되게 툭 튀어나온 한마디,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그래도 지구는 돌아간다. 아직도 아침밥이 목에 걸려 있다.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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