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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 최인호의 장편소설 《길없는 길》리뷰, 제1화 거문고의 비밀]

백두산백송 2024. 1. 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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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최인호 길 없는 길 여백 출판

[산문&감상 : 최인호의 장편소설 《길없는 길》리뷰, 제1화 거문고의 비밀]

[길 없는 길 ] 제1권은 《제1화 거문고의 비밀》,《제2화 대발심 大發心》,《제3화 내 마음의 왕국》으로 되어 있다.

《제1권: 제1화 거문고의 비밀》 , 1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주인공은 영문학과  교수, 아직은 그냥  강교수로 나온다. 그의 이름 강빈. 출생의 비밀을 쫓아가게 하는 작가의 의도적 장치다. 그의 어머니는 기생 강초선,《제1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의친왕 이강(李堈) 공(公)으로 나온다. 이렇고 보면  제1화 《거문고의 비밀》은 1권 전체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제1화》의 극적요소라면 거문고를 찾아가는 내적자아의 심안에 있다. 부정(父情)에 대한 목마름, 거문고에 묻어 있는 아버지의 체취. 아버지로부터 받은 만공의 염주를 가슴에 품고 들어선 수덕사. 부자지간(父子之間), 40년 만의 대면(對面), 이강의 아들 강교수가  아버지의 분신 거문고를 잡고 "현재 나 여기 있음"의 아우라를 보여 주는 것. 이것이 제1화 《거문고의 비밀》의 절정이며 결말이다.

아버지를 찾고는 끝내 울음을 삼키는 주인공. 이는 마지막 제국의 왕인 이강의 울분이요 주인공 강교수의 자폐적 희열이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는 비운의 아들. 곰삭은 울분의 카타르시스, 아버지의 분신인 거문고는 끝내 울지 않고 막을 내린다. 이것은 어쩌면  몰락해 버린 왕조의 환영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주신 염주를 손에 들고 자신의 거문고를 찾아가는 화자의 내적 흥분, 이 흥분이 소설 전편에 깔려 있다 보니 경허를 찾아가는 내 마음도 끝까지 들떠 있다. 그만큼 일생을 숨긴 출생의 비밀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 긴장감의 연속으로 와닿는다.

- 경허(鏡虛). 지금껏  내가 비밀로 40년 동안 줄곧 간직해 왔던 염주에 새겨진 글자. 경허(鏡虛) 성우(惺牛). 그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그 어디에서 알아보려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던  의문의 네 글자.- 경허는 법호요. 법명은 성우(惺牛) 임을 수덕사 주지로부터 알게 되는 주인공.

아버지로부터 받은 만공스님의 염주. 그 염주에 새겨진 경허(鏡虛) 성우(惺牛). 네 글자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 화자의 심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경허는 만공선사의 스승이요. 그 스승의 염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만공. 이 염주의 실제 주인공은 경허였다. 의도적 구성의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이 소설의 키(key)는 거문고에 있다. 그래서 <제1화>의 제목이 <거문고의 비밀>이다. 7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거문고의 소설 속 내력은 이렇다.

700년 전 고려조의 공민왕이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어 상심을 달래려고 만든 악기가 이 거문고다. 공민왕 사후 고려말 충신 길재(吉再)에 넘어갔다가 길재가 죽고 거문고는 조선왕실로 흘러간다. 왕실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다 의친왕이 풍류를 즐기는 가운데 이 거문고가 동원된다. 700년이란 역사성을 지닌 신성의 악기, 거문고는 역사의 깊이만큼 울림이 크고 그 소리는 신비에 가깝게 채색되어 있다.

만공스님과 아버지 의친왕과의 만남. 언어유희에 가까운 두 사람의 대화, 만공의 화술은 끝내 의친왕을 탐복케 하고 만공에 흠뻑 빠진 의친왕이 불가에 귀의하게 되며 서로 신표로 주고받은 것이 염주요, 거문고다. 일단 염주는 만공이요, 거문고는 아버지 의친왕의 분신이다.

충남예산 덕숭산 수덕사, 강교수가 여기를 찾아가는 이유, 이곳에는 거문고의 주인공인 월면 만공이 있기 때문이다. 월면은 만공의 법명이다.  뿐만이 아니라 만공의 스승인 경허와 경허의 제자인 혜월, 수월이 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생불(生佛)인 경허와 그의 제자인 세 명의 달(혜월, 수월, 월면)이 세상을 밝게 비춘다 하여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절이다.

생불(生佛) 경허(鏡虛)의 염주, 염주에는 경허(鏡虛) 성우(惺牛)의 네 글자와 만공의 법명인 <월면(月面)>이 새겨져 있다. 그 염주를 들고 수덕사를 찾아가는 강교수의 서사는 단순하면서도 독자의 시선을 끈다. 작가의 상상력과 깊이 있게 연구한 불가(佛家)의 법도(法道)가 장중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주제를 향한 작가의 밀당이 역시 매력적이다. 최인호, 그가 누구인가.

정리하자면 만공의 것으로 인지된 수덕사 거문고의 실제 주인공은 아버지 의친왕이며, 강교수가 가지고 있는 염주의 주인공은 화자가 그토록 경외하는 경허선사다. 거문고와 염주, 이 둘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인물 만공. 그를 찾아 수덕사를 찾아가는 강교수. 경계 없이 외화(外話)와 내화(內話)가 왔다 갔다 하며 스토리는 막을 내린다.

- 의친왕. 당신은 나의 숨겨진 아버지입니다. 고종 황제의 둘째 아들. 태어나자마자 낳은 생모를 명성왕후의 독약에 의해서 죽게 만든 비극의 왕자 의친왕 이강(李堈) 공(公). 당신은 내가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 보지 못하였던 바로 그 아버지인 것입니다.-

1989년 11월부터 중앙일보에 3년간 연재했던 최인호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

갑진년, 새해 청룡은 상상의 신물(神物)이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할 때가 있다. 거대한 우주 속 한 알의 밀알이지만 나의 피, 나의 원시적 본향을 기웃거릴 때는 때론 절박하고 때론 신비의 숭고미에 젖어들기도 한다.

고귀한 혈동, 화자요 주인공인 영문학 강교수, 경복궁 두 마리 용이 하늘을 날고 있다. 거문고의 비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숭고미, 《길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강교수. 그는 1년 간 집에서 쉬어야 하는 휴직 교수의 신분이다. 궁금하면 최인호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을 읽어 보라. 《길 없는 길》은 1.2.3권 시리즈 완판본이다. (20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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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읽고 있다. 10년 전 소설이니 현대판 고전이다. 불후의 명작은 시공을 초월한다. 이것을 우리는 문학의 항구성이요, 보편성이라고 한다. 최인호, 1945년 서울태생.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 《벽구멍으로》이 가작으로 당선.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타인의 방>, <잠자는 신화 >, <개미탑>, < 위대한 유산> 등의 소설집이 있고, <별들의 고향>, < 도시의 사냥꾼>, < 잃어버린 왕국>, <상도>, < 내 마음의 풍차>, <불새>, <제4의 제국>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수필집으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천국에서 온 편지> , <인생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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