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최인호의 장편소설 소설《길 없는 길》 제3화 내 마음의 왕국 ]
[길 없는 길 ]:최인호 장편소설 1
<제3화 내 마음의 왕국 >
♤ 메멘 또 모리
<제3화>는 다시 일인칭 시점으로 돌아오며 《제1권》 을 마무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1권》 에필로그가 <제3화>다.
폐망의 왕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카타르시스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절정을 치닫는다. 세자마마로서의 고귀한 혈통, 그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스핑크스요, 무정란임을 자각한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비운의 죽음들, 할아버지 고종도, 할머니 기생 장 씨도, 아버지 의친왕도, 어머니 강초선도 비운의 운명으로 갔다. 그래서 감상문의 제목을 소설 속에 나오는 <메멘 또 모리>로 잡고 줄거리와 감상을 버무려 본다.
"메멘 또 모리, 죽음을 잊지 말자. 죽음을 기억하자."
나의 어머니도 강빈(姜彬) 교수의 어머니도 갔다. 서녘하늘 저무는 태양빛을 배경으로 위패가 있다면 같은 하늘 같은 땅을 바라보며 무릎 꿇고 축원하였으리라. 만고(萬古)의 진리, 어머니는 위대하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오욕칠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세월 살다 간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그래서 누구나 위대하다. 하여 그립고 서럽다.
강초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간직했던 속치마 하나. 그 속에 쓰여 있는 의친왕에게 받은 친필 휘호, "취중안하 무영웅(醉中眼下 無英雄)". 초선 나이 16세 어린 나이로 첫날밤, 자신이 입은 속옷 위에 남편으로부터 이 휘호를 받았다. 이것을 남편의 정표로 받아 들고 생명보다 더 애지중지했던 초선, 아니 강빈의 어머니. 눈물 한 방울이 책장에 떨어짐은 왜일까. 긴 삶의 여정, 심청가를 틈날 때마다 소리 높여 외친 그녀의 판소리 한 가락이 지붕 위 속치마와 함께 가슴을 후려치기 때문이다. "술 취한 눈에는 영웅이 없다"는 다소 장난기 어린 시 한 수가 만장(輓章)되어 나의 가슴을 후벼 판다.
<제3화 > 줄거리의 맥을 짚어가며 감상을 덧칠해 본다.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생전 천박한 기생으로 한평생을 보내고 그에 어울리도록 수많은 남자들과 살을 섞고 살아왔음을 며느리에게 숨기려 하거나 애써 변명하려 하지 아니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두고 자부심을 갖고 늘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자신이 황자(皇子)의 성은(聖恩)을 입은 황녀(皇女)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만은 굳게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킨 것이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어머니의 속치마를 보자 내 가슴은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평생토록 소중히 간직하였던 속치마. 그 누구에게도 첫날밤에 휘호를 내린 속치마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려 하지 않았던 어머니. 아아, 그리하여 단 하나의 아들인 내게 아버지의 성(姓)씨인 '이 왕가(李王家)'의 '이(李)'씨마저 물려주지 못한 어머니의 속치마. 자신의 성인 "강(姜)씨의 성(姓)을 아들인 내게 물려준 어머니의 속치마.
비롯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자로 태어난 아버지. 당신에게는 하룻밤의 노리개 상대였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그 여인은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소용도 없는 왕손을 낳아 나를 전하(殿下)로 키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있어 반은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내게 있어 나머지 반은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버지 당신의 아들임을 아는 단 하나의 여인인 어머니가 이제 죽었습니다.-
왕자라 하지만 멸망하여 나라도 황실도 빼앗겨 거세당한 이름뿐인 왕가. 그래도 아버지 의친왕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달려갔던 인물.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깡그리 몰수당한 강빈(姜彬).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통곡을 한다.
-아버지 의친왕의 주검은 왕가의 왕릉에도 묻히지 못하였다. 고종황제의 세 아들 중 가운데였던 아버지만 빼놓고 다른 아들들은 왕릉에 묻혀 있다. 그 무덤 앞에는 묘비도 없고 왕가의 무덤임을 알리는 석인(石人)들도 없다. 그저 봉분뿐이다.
아내는 나를 낳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저 기생으로 한평생을 보냈던 어머니가 오다가다 기방을 드나드는 손님과 눈이 맞아 정분을 나눈 끝에 내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고귀한 혈통 강교수, 어머니 초선은 살아생전 며느리에게 딱 한 번 이런 말을 남겼다.
-"네 서방은 물론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태어난 아이는 절대로 아니다. 난 갓 스물도 못되어 네 서방을 낳았는데 낳을 만한 사람에게서 낳았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라도 네 서방을 깔보아서는 안 된다."-
어머니를 품지 못하는 아들이지만 그의 출생 비밀을 끝까지 지켜며 아들의 자존심을 가슴으로 안고 간 어머니.
-1877년 고종의 맏아들 순종의 나이 세 살 때 궁인 장 씨는 궁밖의 외가에서 강빈의 아버지 의친왕을 낳았다. 탄생 6개월 후 고종의 비(妃)인 명성왕후에게 들키고 말았다. 명성왕후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며 죽어간 여인, 의친왕의 어머니 장 씨. 지금 아버지 무덤 옆에 "貴人 德水張氏之墓"란 묘비명을 새긴 묘비가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의친왕도 강빈도 그들의 몸에는 기생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일가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두둥실 한 점 구름이 서녘하늘을 향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 중학시절부터 의문을 품기 시작한 강빈. 생물시간에 들었던 무정란 홀알을 떠올리며 자신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무정란의 중성임을 자각한다.
- 수탁의 몸을 받아 암탉이 낳은 알을 우리는 수정란이라 부르고 수탉 없이 암탉이 낳은 알을 무정란이라고 부른다. 무정란은 절대로 부화되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 -
한창 자라는 시기, 자신이 태어나기는 했지만 거세된 노새. 생식 기능이 마비된 노새, 젖먹이 동물이 아니라 알에서 태어난
난생동물이요, 무화과(無花果) 임을 자각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회의는 대학을 입학하면서 절정을 치닫는다.
나는《제1화》에서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 자각, "가끔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할 때가 있다. 거대한 우주 속 한 알의 밀알이지만 나의 피, 나의 원시적 본향을 기웃거릴 때는 때론 절박하고 때론 신비의 숭고미에 젖어들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
강빈, 《제3화》, <내 마음의 왕국>, 폐망한 세자마마의 정체성에 대한 비탄이 몽상 속 가슴앓이로 이어진다. 30년 전의 기억, 어머니와 난생처음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선 강빈.
-오늘부터 아드님이신 그대의 성(姓)은 이(李)씨로 되었으니 그런 줄 아시오. 제가 비록 기생의 신분인 천비(賤婢)이오나 아드님이신 그대는 왕세자의 세자마마입니다. 세자께오서는 왕가의 피를 타고난 왕자마마입니다. 세자마마, 제가 올리는 술 한잔을 받아 드십시오. 어머니의 그 말 한마디가 내 영혼을 파고들었다.
"나는 왕좌다. 나는 왕가의 피를 타고난 왕좌다."
만약 왕조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황위에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어머니의 비천한 기생의 피가 흐르고 있다. 내 아버지인 의친왕에게도 비천한 기생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생모인 장 씨에게도 기생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나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스핑크스다. 그러나 나는 안다. 왕조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물여덟 명의 이복형제들을 따돌리고 대군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황휘를 노리는 권력다툼이 있었다면 나는 반드시 이겼을 것이다. 반정(反正)을 꾀하여 혁명을 이루어서라도 나는 황휘에 올랐을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그 엄청난 출생의 비밀이 내게 꿈의 세계를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 나를 몽상가(夢想家)로 만들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대학생으로서 빛나는 청춘보다 우울한 몽상가가 되었다.-
엄청난 충격, 정체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망해버린 왕조의 후예로서 왕국을 꿈꾸는 몽상가로서의 내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한낮의 왕릉 속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인 고종황제의 침전 (寢殿) 속에서 울었고 왕릉 위에 소주를 따라 부으면서 울었다. 나는 그 무덤 속에 묻힌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가엾은 할아버지,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된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덤 속에 묻힌 할아버지 고종보다 더 불쌍했던 것은 왕릉 위에서 울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 나는 내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강교수의 어머니도 불자였고 나의 어머니도 불자였다. 강교수는 49제를 올렸고, 나는 어정쩡하게 불교식 장례에다 천주교식 기도로 명복을 빌었다. 생의 고비를 넘기며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났고, 어머니는 먼 길을 아들의 안수로 그렇게 가셨다. 세렌디피티, 극과 극의 안식과 평화의 극락세계, 그 어느 한 지점에서 소설 속 강빈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그렇게 편안히 가셨으리라 믿는다.
<제3화 내 마음의 왕국>, 강빈(姜彬), 밀폐된 자의식, 몽상가로서의 자폐적 카타르시스, 그 비운의 정체성은 이렇게 마무리되며 《제2권》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20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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