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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제1부 제1화]

백두산백송 2024. 1.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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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제1부 제1화]

         -허준은 울고만 있지 않았다-

소설 동의보감을 다시 들었다. 1990년대 중반쯤  실감나게 읽었던 소설. 젊었을 때도 커피보다 한방차를 좋아했던 나는 쌍화차나 매실차 또는 유자차를 지금도 좋아한다. 특히 쌍화차를 마실 때는 계란의 노른자가 왜 그리 감칠맛 나는지. 어쩌다 동성로 미도다방에서 쌍화차 한 잔을 마실 때는 어린 시절 닭장 속에서 보았던 암탉이 지나가고 소죽 끓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다시 든 동의보감도 한 모금 쌍화차처럼 내 마음을 우려낼 '마음의 한방차'가 되면 좋겠다.

작가 이은성(李恩成)은 여자가 아니라 사나이다. 은성이란 이름은 남녀에게 다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다. <다음 나무위키>에는 "한국의 영화 및 드라마 작가이자 국가적으로 한의학 붐을 일으킨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1937년생. 1988년 과로사로 사망. 도쿄도 출생이다.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녹슨 선(線) > 당선.  사후(死後) 제25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시나리오 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소설로는 <소설 동의보감>이 유일하다.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16세기말!
조선 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차별 속에서  천첩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정일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양평군(陽平君)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사나이!

한방(漢方)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손을 대신한 신인(神人)으로 숭앙받던 동의보감(東醫寶鑑:  전 25권으로 된 의서. 1613년 간행)의 저자 허준(許浚). 이 소설은 그 불꽃보다 뜨거운 생애를 살다 간 허준의 일대기다. <序說全文> (소설 동의보감 상, 중, 하 3권 /창작과 비평사 1990년 초판 발행)

대뜸 욕부터 치솟아 오른 허준, 그는 지금 과거를 보러 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때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조선의 14대 임금으로 선조(宣祖)가 즉위 한 첫해(1568)  평안도 용천(龍川) 오도곳(五道串)의 큰 나루.
간간이 싸락눈이 섞인  2월의 갯바람이 살을 에듯이 모질었다.-

허준, 어머니는  양가 출신의 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천첩(賤妾)이다. 어머니 생모 손씨(孫氏)는 인종(仁宗) 당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집안 적몰(籍沒), 하천(下賤)  되었다. 생부(生父)는 용천 군수. 허준은 그 아버지 첩의 자식이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 그의 이마에 솟구치는 파란 힘줄, 그는 과거를 보러 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내며

"개 같은 xx들!", "더러운 xx들!", "이 따위 세상! 사그리 불태워버려!" x놈들!" 욕이란 욕은 다 뱉어 내고 있다. "씨~x 놈들, 네 미랄 자식들."

어머니 천첩 소생, "그 천첩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여 양반 상놈이라 불리던 양민 즉 농군들에도 미치지 못한 천것들에 대한 신분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가혹한 것이었다. 공천(公賤)이란 관부(官府)에  종사하던 종들을 일컫는 것으로 개개인의 종인 사노비란 그 가문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상속했다. 아비나 어미가 종이면 그 소생 또한 어김없이 종이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제도로 자유 하나 없는 사노비. 자자손손 세습하여 주인댁 문전 안에  종의 꼬리표를 달고 살다가 다음 대의 종을 낳아주고 또 낳아주며 또 낳고 낳으며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사노비의 신세."

허준의 이마에 사라졌던 힘줄이 다시 불끈 솟았다.  골백번 단념한 신분에의 자각, "죽일 x들, 모조리 싹 죽여버려야 돼."

머리에 얹고 다니던 큰 갓 조각이 파도 소리 따라 흘러가고 때 묻은 갈매기 한 마리가 허준을 비웃듯이 자유롭게 바다 위로 떠갔다.

-후일, 무덤 속의 생명을 끌어내고 한 마리 갯지렁이조차 밟으려 않던, 온갖 병고(病苦)를 구하려 애쓰던 그와 전혀 반대의 무서운 말을 그는 지금, 여기 용천(龍川) 오도곶(五道串)의 큰 나루에서 마구 토해내고 있다.-

사람은 신분에 대한 자각, 열등의식이 치받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나는 왜, 내가 누구지, 우리 집안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 아니 에고(ego)의 세계는 극한이 없다. 끝없는 자기애에 대한 충동. 문제는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말했듯 선택적 충동,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근원적 차이를 실감한다. 싸락눈이 간간이 흩날리는 2월의 갯바람, 벌겋게 눈물이 번진 허준의 눈자위 위로 싸늘한 눈발이 와닿는 가운데 그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용천을 떠날 준비를 다짐한다.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 극한 욕설의 카타르시스, <제1부 1화> 나는 소제목을  '허준은 울고만 있지 않았다.'로 달아본다.  그의 실존적 자아가 빚어낼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이상세계, 그 꿈의 동의보감 <제1부 1화> 줄거리 및 감상을 여기서 매듭짓는다. <제2화> '오도곶에서 용천읍까지 25리', 그는 술친구 '양태'놈을 생각하며 오도곶 해안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다.(20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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