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 제3화]
-여자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휘영청 밝은 달, 달그림자를 밟고 허준은 용천군의 원찰(願刹)인 용호사(龍虎寺) 경내로 들어섰다. 언제 눈보라가 쳤었냐는 듯 밤하늘이 구름 걷힌 허준의 마음이다. 친구 양태를 끝내 못 만나고 돌아선 발길. 허준의 운명을 바꿔 줄 한 여인의 발자국이 흰 눈 따라 선명하게 눈을 파고든다.
발자국 따라 치마가 쓸고 간 흔적, 분명 여자의 발자국이다. "이 시각에 계집이 이 눈 속을 혼자서 다닌단 말인가?"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마을로 이어져 있는 여인의 발자국을 단숨에 따라잡은 허준.
-문득 여자가 허준을 돌아보았다. 허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댕기가 허리 밑으로 처진 젊은 처녀였다.- 재미있다. 관음증 환자는 아니지만 소설 속에서도 뭔가를 훔쳐본다는 것은 재미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 허준도 나도 호흡이 가빠지기는 마찬가지다.
대지의 여신 판도라는 말했다. "나는 판도라다. 모든 것을 주는 신이다. 나는 인간이 가진 질병과 배고픔을 덜어주는 나무를 줄 것이고, 직물을 짜고 염색을 하는 나무를 줄 것이다. 그리고 이 땅 아래에는 많은 진귀한 광물과 보석이 있으니 너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부싯돌로 너희는 불을 만들 수 있다. 끝으로 너희에게 호기심과 기억을 주고, 자비와 정의를 주고, 서로 보살피는 마음과 용기와 강인함을 주고 평화의 씨앗을 주겠다."(출처:심리학으로 읽는 그리스신화/보아스 출판, 참조)
"대지의 여신 판도라"를 따라가는 허준, 적어도 내 눈에는 작은 발자국의 여인이 신화 속 "판도라 여신"으로 다가왔다. 세상의 온갖 질병을 치유하는 "희망의 여신", 허준의 일생은 판도라와 함께 흘러간다. 신화도 현실도 사나이의 운명은 "판도라의 여신", 여자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용천군민의 원찰(願刹) 용호사(龍虎寺), 허준의 어머니는 이 절 주지스님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어머니의 치성이 이 처녀를 만나게 했음인가. 허준의 눈에 처녀의 태깔이 곱게만 다가온다.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허준의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이런 시각에 어찌 혼자 다니시오, "
"시각이 야심한 줄 알면 어찌 아녀자의 가는 길을 함부로 막으시오니까."
머리에 갓도 없는 허름한 허준의 행색이지만 그래도 몸에 걸친 사대부의 복식을 신뢰한 여인이 말을 받아 건넨다. 주고받는 말 따라 행간의 의미는 처녀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전골(閑田洞) 도공(陶工), 상것의 딸이 아닌 사신 행차 따라 명나라를 오가며 얻은 병을 고치고자 북청(北靑) 적소(謫所)를 떠나 서북으로 명의(名醫)를 찾아온 귀양살이 양반의 딸인 "다희"다.
차라리 상것이라면...... 상것은 조선중기 이후 평민을 의미하는 말이다. 허준은 순간 좌절한다. 양반의 딸, 자신은 혼인도 사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 허준의 허탈한 마음, 또 뛰어넘을 수 없는 높고 높은 담, 기어이 그는 새벽 첫닭이 홰를 치자 어쩔 수 없이 도망치듯 내리 달려 담장을 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아픈 만큼 사랑은 찾아온다. 엉덩이를 잡고 몇 번을 불러보는 이름, "다희", "다희".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 이미 온갖 불행 속 희망만이 남아 있는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기 시작했다.
라이너 쿤체의 시 <두 사람>이다. 파란 희망이 보인다.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라이너 쿤체는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서정시인이다. 대표 시 중 하나로, 결혼 축시로 자주 낭송되는 시다. 한 배에 탔다는 것은 운명 공동체다. 별은 목적지이고, 폭풍은 그곳으로 가는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예기치 않은 일이다. 삶의 지혜는 파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파도를 멈추게 할 수 없다. 관계의 절정은 함께 힘을 합해 파도를 헤쳐 나가는 일이다. 이 시의 원제는 <두 사람이 노를 젓다>이다.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 별과 폭풍이 반복되며 한 편의 노래로 들린다.- [<시와 글>, 출처:시로 납치하다/류시화/더숲 출판]
함께 노를 저어 갈 두 사람, "허준"과 "다희"의 길이 운명처럼 다가온다. 허준을 향한 내 발길도 바빠지고 있다.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명작수필이 "마음의 보약"이듯 명작소설 역시 "마음의 명약"이다. (202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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