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책 읽기 & 감상

[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 제2화]

백두산백송 2024. 1. 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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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 제2화]

-봄을 맞이할 마지막 대설-

친구 없이 살 수 있을까. 남자나 여자나 괴로울 때는 친구를 찾아간다. 일없이 잘 지낼 때는 친구도 필요 없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괴로울 때 친구만한 상담사도 없다. 허준도 늘 괴로우면 친구 양태를 찾아 신세타령하며 퍼마신 술이 한 말은 넘지 싶다. 그것뿐이랴. 책갈피를 오고 가는 이야기를 힐끔힐끔 쳐다보면 내심 불쌍한  "천첩, 어머니의 울분"을 아니 "불쌍한 한 여자"의 일생을 위무하듯 그렇게 자책하며 작부들의 가슴을 마구 쳤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괴로울 때는 친구와 술이 딱 제격이다. 허준도 속이 뒤틀리면 술친구 양태를 찾아간다.

양태와는 어울렸다 하면 술판이 벌어진다. 군서산(軍西山) 봉수군(熢燧軍) 말똥창고지기 술친구. 봉수(熢燧), 봉(熢)은 홰에 불을 켜는 야간 신호용이요, 수(燧)는 싸리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로 신호를 삼는 주간용 신호다. 부리나케 달려가지만 양태는 봉수대에 없다.

"열길 백길 천길  이까짓 세상 모조리 파묻혀 버려!" 허준의 입이 다시 들끓기 시작,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절망이 파란 불덩이를 마구 쏟아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을 파고드는 어머니.

한사코 글을 배우게 한 어머니의 눈물도 지금은 가소로울 뿐이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반감이라기보다는 자식으로서의 연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불쌍한 어머니." 어릴 적 정실 추씨에게 온갖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뚜렷이 바라본 허준.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에서 "불쌍한 여자"로 각인되어 갔다.

정실 추씨의 오만가지 투기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허준 나이 아홉 되던 해, 어머니를 천적(賤籍)에서 뽑아 자유로이 떠나보내려 했음에도 이를 거절하고 떠나지 못한 어머니. 그 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성장한 자식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 정실 추씨가 죽자 그렇게 당했던 고초와 수모는 뒤로 한 채  그녀의 죽음 앞에서 통곡해야 했던 어머니는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닌 "불쌍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글을 알고 공부를 했지만 과거를 볼 수 없는 "천것" 신분의 허준.  태생에서부터 갈라놓은 세상의 제도와 소위 양반이란 작자들을 향한 울분.

"죽어도 하나 아깝지 않은 목숨이야. 숨만 쉬고 있지 이미 나는 죽은 목숨인즉....."

콧방귀부터 뀌어졌지만 청년 허준은 청년의 행복을 골똘히 생각해 내려했다. "행복? 내가? 살았되 인간답기는 아예 바라볼 수도 없는 어머니와 나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행복은 무엇일까."

소설의 묘미, 허구적 낭만 속에서 느끼는 열락이란 때론  이런 복선이 주는 예감이요 희망이다.

봉수대 말똥창고 앞에 서서 바라보는 철산과 의주를 연결하는 큰길을 따라 번화한 용천읍이 백설에 덮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허준. 대설은 이미 봄을 먹고 있다.

작가 이은성, 짧게 짧게 이어가는 단막극이 주는 극적구성처럼 장막 속에 가리어진 허준의 일생에 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극적작가의 극적구성. 역시 나는 작가의 노련한  의도적 장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이끄는 서사(敍事)의 3 요소가 "시간, 행동, 의미"다. 그리고 서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건, 인물, 배경"이다. 이것을 일러 소설 구성의 3요소라 한다. 그리고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가 쓴 소설의 극적 구성, 그 절묘한 희열을 느끼며 나는 증오와 절망에 찬 허준이 뱉어내는 말을 다시 생각하며 <제2화> 마지막을 빠져나온다.

"열길 백길 천길 이까짓 세상 모조리 파묻혀 버려!"

"주먹만한 북국의 눈발들이 허준의 주변에서 생물(生物)  떼처럼 소란하게 맴돌았다, 봄을 맞이하는 마지막 대설이 될 모양이었다."

<제3화> "용천군민의 원찰(願刹)인 용호사(龍虎寺)의 경내로 들어 선 허준의 눈에 "여자의 작은 발자국이" 들어오고 있는데.....(20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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