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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 제4화]

백두산백송 2024. 1. 20.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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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龍川脫出 제4화]

-어머니는 위대하다-

어느 시대나 위대한 어머니는 자신을 버릴 줄 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도  허준의 생모 손씨(孫氏)도 심지어 홍길동의 어머니 시비(侍婢) 춘섬도 그렇게 살다 갔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健陽多慶), 복(福)은 지어야 한다. 그냥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홀씨 하나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날이 멀지 않았다. 오늘 대한(大寒) 지나면  2024년 입춘(立春)도 얼마 남지 않았다. 대지의 여신, 판도라는 '모든 것을 주는 희망의 신'이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그렇다.

공노(公奴) 천첩(賤妾) 소생(小生)의 허준, 주어진 신분에서 오는 분노와 울분, 서슬 퍼런 외침이 파란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 대설도 녹아들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허준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설렘은 꿈이요 희망이요 사랑이다. 용천대탈출, 허준의 일생에 대반전의 극적장면이 드러난다. 극적장면은 대화와 행동으로 묘사된다.

"비록 네가 머리에 큰 갓을 쓰는 양반은 될 수 없으되 천적(賤籍)에서 몸을 뽑아 상민(常民)의 작은 신분이라도 지니어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그게 네 어미의 소원인 걸 몰랐더냐."

아버지 허륜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난 지금 네 생부로서 너와 마주 앉자 있는 것인즉슨......" 허준의 눈이 번쩍 들렸다. 이 전율, 놀라운 반전이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아우라라는 말을 한다. 사또 아닌 생부로서 하시는 말씀, "아버님~", 허준의 외침이 내 가슴을 콕 찌른다. 극적대화가 주는 카타르시스, 허준의 가슴이 뛰니 내 가슴도 요동친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씀인 생부, 그리고 처음으로 말해보는 아버지~." 역사는 이렇게  또 하나의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다.

" 네 나이 스물두셋, 국법에 따라 신분은 미천할지라도 내가 보는 안목에 이젠 능히 제 어미 하나는 건사하리라 여기어  떠나보내려는 것이다. 네 태생 네 신분을 아예 단념하여 이대로 조용히 내 그늘에서 살고파 한다면 그도 말리지 않을 것이오, 내 슬하를 벗어나 새 세상을 찾아 나서겠다면 기회는 지금일 것이야."

비장미에서 숭고미로 치닫는 서막과 전조, 그 극적 떨림.

"신분에의 탈출, 그걸 아버지가 주선할 줄이야! 허준의 목이 잠겨갔다.

"아버님!"

벌겋게 달아오른 허준이 방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너희 모자 떠날 것을 결심한다면 너희가 잠시 의지할 곳이 있는 고장을 정해주마. 남쪽 경상도 땅에 산음현(山陰縣)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 현감이 애비와는 호형호제하는 사람으로 애비의 서찰을 보이면 가히 너희 모자가 호구할 생업쯤은 주선해 줄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공들이 사는 곳에 머물러 있던 다희의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조정에 죄를 얻어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계시던 분으로 관직에 계실 제 명나라 사행(使行) 차  오가시는 길에 의주에서 우연히 어떤 명의를 만나 지병을 쾌유하신 바가 계시옵는데, 이제 다시 배소에서 그 병이 재발하시어 옛 그 의원을 만날 양으로 의주까지 갔다가 허행을 하고 배수로 돌아가던 길이 올 시다."

"어렵사리 의주에 당도는 했으나 그 의원을 만날 길은 없었고 그 의원은 본시 의주 사람이 아니요, 중국에서 넘어오는 약재를 구하고자 잠시 의주에 머물며 아버지를 만났을 뿐, 사는 곳이 경상도 산음이란 것만 들었습니다."

이 사나이, 장차 허준의 스승이 될 그 이름, 명의(名醫)  유의태(柳義泰).

"그래서 찾아온 그 용타는 의원은 경상도 산음 사람이란 말이오?"

"그걸 의주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당시 아버님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위중한 병자들을 수없이 살려낸 탓에 유의태라는 그 함자를 여러 사람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유의태?"

탄탄한 구성, 스토리는 필연적 구성을 요구한다. 허구적 소설이지만 철저히 필연적 만남, 그 인과적 필연성이 긴장감을 더해 주는 것이 현대소설의 특징이다.

필연적 만남, 다희 혼자 치를 수 없는 초상, 비록 정실 소생은 아니지만 아버지 허륜의 배려 속에 상례를 갖추어 다희의 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시는 허준을 바라본 다희. 초상 속 내밀히 주고받는 신뢰 속 사랑은 싹튼다. 비장미 속에 꽃피는 우아미. 두 사람의 합일. 다희 아버지의 봉분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허준의 가슴을 파고드는 다희. 일은 끝났다.

집안이 떳떳할 때 정혼했던 사헌부 감찰인 김철헌의 자제 김상기. 아들 김상기의 연정과는 무관하게 당도한 파혼의 통지. 인간적 배신감과 허탈에서 주어지는 극적 세렌디피티의 선순환. 다희가 맞이한 극한 불행의 틈새를 파고드는 진정한 조력자인 허준의 어머니 손씨. 비록 지금은 첩의 신분이지만 속살은 양반집 규수. 하늘과 땅만큼, 그 높낮이만큼 차이나는 신분의 벽을 뚫고 다희와 허준을 부부의 연으로 이끌어 가는 모정. 이래서 어머니 손씨는 희망의 여신 판도라다.

"사람의 귀천은 행실이 가늠하는 것이옵지 신분의 고하에 구애되는 건 아닌 줄 아옵니다."

"소녀 또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련한 처지이옵니다. 지닌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몸이오나 남자 되는 분의 부모와 집안이 허락하시는 인연이면 탈상을 마친 후 감히 권하시는 바를 따를까 하옵니다." 손씨가 다희의 손을 잡았다.

생부 허륜의 도움으로 경상도 산음을 찾아가는 세 사람. 온통 붉게 물든 서해바다 저쪽으로 용천의 산하가 멀어져 갔다.(202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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