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名醫 柳義泰 제2화]
-나도 '샐리'를 꿈꿔본다-
산음 땅에서 허준을 이끌고 있는 인물, 우선은 이방, 그리고 구일서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도 중요하다. 그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 이유 없이 도와주고 싶은 사람. 도움을 받고도 부담이 없는 사람. 타고난 복 중에 사람복도 으뜸 복이라. 산음에서 처음 만난 이방과 구일서, 이 두 사람은 허준에게는 천사 같은 인물들이다.
조력자 이방(吏房)은 공방(工房)인 구일서를 주막집으로 데리고 온다. 공방은 조선시대 승정원과 지방관아에 딸린 육방의 하나. 육방은 잘 아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을 아우러는 말이다. 구일서 앞에서, 전임 사또 조현감과 친분이 있는 용천 땅 현감인, 아버지 허륜의 서출인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허준. 역시 동의보감의 저자답게 상황 판단이 빠르다. 구일서에게 매달려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두 개의 법칙에는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이 있다. 선택의 순간, 진정한 용기는 머피보다는 샐리를 잉태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일들이 우연히 반복되는 샐리의 법칙. 적어도 내가 보기에 허준은 머피보다는 샐리에 가까운 용기 있는 인물이다. 철저히 유린된 봉건사회에서 용천탈출은 신분에의 탈출이요 거듭나기다.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은 일어났고, 우연히 만난 아내가 될 다희, 그리고 구일서를 통한 유의태와의 운명적 만남. 허준 같은 인물이 바로 샐리다.
약초의 고장인 산음. 빈손으로 들어온 사람도 3년만 꿈지럭거리면 3년 먹을 것을 들고나간다는 구일서의 말에 귀가 솔깃한 허준.
"산음(지금의 경남 산청), 이 고장의 특산은 보혈(補血)에 좋다는 당귀, 해수, 갈증 따위에 특효라는 오미자 그리고 인삼 등인데 인삼은 굳이 이 고장 것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당귀, 오미자는 그 약효가 뛰어나 이 고장 것이 타지방의 것보다 세 곱절이나 돈을 받는 최상품입지요."
"...... 약초."
"코앞이 지리산인데 제철이 되면 약초가 골짜기마다 나고 또 약초를 딸 철이 아닐 때는 마연동(馬淵同) 사철광(沙鐵鑛)에 가면 그 품값 또한 두세 식구 먹고사는 데는 모자라지 않는 돈벌이 올시다."
" 이 고장에 철이 난단 말씀이요.?"
"마연동이라고 북쪽 산인데 거기서 나는 쇠는 이 산음의 유명한 세공품 올시다. 하하하, 그리고 또 혹시 운이 틔고 신령이 돌봐주면 산삼이라도 캐어 팔자 제대로 고치는 사람도 혹간 있고......"
구일서, 상처 후 새로 맞은 아내와 젖먹이 아이 그리고 노모와 같이 있는 인물로 한 잔 술을 마신 그가 자신의 집 뒤꼍 허드레방을 허준으로 하여금 임시 거처로 쓸 것을 제의한다. 이것이 천우신조요, 셀리의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어딜 가겠는가.
뿐만이 아니다. 술집 주모가 한 상 가득 차린 밥을 먹고 어머니 손씨가 배탈이 나자 마주치게 되는 유의태. <핼리가 샐리 만났을 때 >우연히 좋은 일들만이 일어나는 '샐리'가 곧 허준이요 허준이 바로 '샐리'다.
남자종 중노미를 따라 유의태를 찾아 나서는 세 사람. 밤길을 밝히는 등불이 유난히 빛난다.
유의태, 허준의 눈에 처음 비친 그의 모습, 작가 이은성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의원이 지닐법한 인자함이나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히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 뵈는 중키에 몸도 마른 볼품없는 사내가 허준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아들 도지(道知)와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유의태. 소설이지만 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극적장면이 주는 하나하나가 명장면이다. 가끔은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것이 독서가 주는 묘미다. 독서(讀書) 삼매경(三昧境)이란 말과 공자가 말한 시경(詩經) 삼백 편을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것이 그냥 나왔겠는가.
병자를 다루는 유의태를 바라보면서 다희가 말했다.
"마치 사람의 몸속을 꿰뚫어 보는 사람 같습니다."
유의태도 그저 먼 길 배탈이 난 어머니 손씨의 맥을 짚으며 눈은 허준을 향하고 있다. 아내 다희도 유의태도 사람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허준은 샐리다. 한눈에 허준을 알아보고 있는 유의태. 허준의 이름을 묻는 순간 허준은 벌써 허준이 아닌 허준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복선이다.
"아들 하나 총명한 자식 낳았군."
어머니 손씨를 향한 유의태의 말이다.
극적전환, 한마디 말을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난 유의태. 그는 이미 허준을 품에 안고 있다.
문제는 어디를 가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문제다. 문제라기보다 자신의 밥그릇을 행여 빼앗길 것을 우려해 쉽게 자신들의 영역침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의태를 둘러싼 영달이와 장쇠 등의 잡꾼들과 한바탕 텃세소동을 질펀하게 치른 뒤 유의태의 아들로부터 유의태의 제자로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허준. 그는 기어이 약초꾼으로 변신한다.
소설 속 주동인물과 반동 인물의 대결, 이런 과정을 거치며 주인공들이 개성적 인물, 일러 창조적 인물로 거듭나는 것이 현대 소설의 특징 중 하나다. 이들을 일러 입체적 인물이라고 한다.
허준, '마음 한구석 우뚝 선 강렬한 영상, 유의태. 그 도도함, 교만에 가까운 오연함, 그리고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 속에 번뜩이는 자신감. 의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는 허준이다. 그러나 그때 허준의 눈에 비친 유의태는 허준이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본 하나의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기왕 약초 캐는 일로 접어들려면 유의태 밑에서 일하고 싶은 허준. 구일서로 하여금 유의원 댁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간청을 한다. 이 말은 아예 유의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겠다는 뜻이다. 역시 위기 탈출의 능력이 비범한 허준의 범상치 않은 선택이다.
'샐리'로서의 허준, '이어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으려니 거푸 있구나 하며 시종 웃고 있는 구일서와 눈을 마주쳤다.'
"좋은 일이 있다니요?"
허준이 되묻자,뒷방에 신방을 마련해 놨다고 말하는 어머니 손씨. 구일서도 웃고 어머니 손씨도 환한 얼굴로 허준을 반긴다. 구일서, 정말 의리의 사나이다. 아직도 주막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허준에게 흔쾌히 신방을 차려준다.
"혼사란 인륜지대산데 사람들도 모아 술잔이라도 돌리며 이웃 간에 알리고도 싶었으나 서로의 사정이 구차한 터이고 또 이미 내외간으로 알고 있는 터에 새삼 구설에 오르내리는 건 그대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싶어 그냥 정갈하게 상만 하나 차렸어. 다행히 꾸며놓고 사용 않던 이불이 한 채 있어서 그걸 옮겨다 놓았고......" 구일서를 향한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록 육례(六禮)를 갖추지 못한 채 명색뿐인 초래상 앞에서 구일서를 집사(執事) 삼아 교배례(交拜禮)와 진찬(進饌)만으로 생략한 혼인 절차였으나 그 신랑을 맞아주는 다희의 가슴은 따뜻했다.' 허준도 울고 나도 운다. 카타르시스, 기쁨의 눈물, 감동의 눈물이다.
용천 탈출, 수천리 산 넘고 물 건너온 산음, 그리고 첫날밤,
'분첩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그녀의 살결들이 허준의 거센 숨결 앞에서 때때로 경련했다. 어디선가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듯이 조용히 봄밤이 깊어갔다.'
"꼬끼오~~." 새벽닭이 홰를 치는 듯하다. 허준 , '샐리'가 분명하다. '샐리의 법칙', 나도 '샐리'를 꿈꿔본다.(202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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