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名醫 柳義泰 제1화]
-드디어 경남 산음 땅 도착-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도 다 때가 있다. 순간의 선택, 과거 냉장고 선전을 하면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했다. 살아보니 삶에 있어 비롯 그것이 순간의 선택일지라도 평생을 좌우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택, 신중할수록 좋겠지만 신중하다고 해서 꼭 성공적인 것도 아닐 성싶다. 일정 부분은 분명히 운명이란 것도 있다. 다만 그 운명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에 역점을 두고 싶다. 다희와 허준, 둘의 운명은 어느 정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든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삶의 지혜, 소설이지만 이 속에도 온고지신과 법고창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것이 명작을 읽는 또 하나의 이유다.
새로운 삶의 공간, 산음으로 향하는 세 사람, 허준, 어머니 손씨, 며느리 이다희. 다희는 머리를 틀어 올렸지만 아직 합방을 하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는 후일 허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스승 유의태가 있다.
천수백 리 먼 길을 아버지 허륜의 배려로 장번사령과 육로가 아닌 배를 타고 간다. 장번사령이란 조선시대 관아에서 미천한 일을 맡아 행하는 심부름꾼으로 생각하면 된다. 호사다마라고 이놈의 사령이 한바탕 재를 뿌린다. 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들 때문에 엉뚱한 고생을 하기도 한다. 고을 원님 허륜으로부터 받은 산음까지의 노자돈을 들고 도망쳐 버린 x. 죽일 x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끈질고도 구질구질하게 오래 산다.
수도 한양에 도착, 장번사령이 도망을 친 가운데 또 하나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작가 이은성. 역시 노련한 극작가다. 허준과 다희를 진정한 부부로 엮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을 미리 정리해야 한다. 적절한 인과적 필연성이 극적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양 땅에 도착하자마자 경상도 산음행의 배를 찾는다는 핑계로 도망을 가버린 사령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 버린다.
작가의 치밀한 구성, 혼기를 앞두고 다희가 정혼을 한 한양 땅, 여기에는 정혼남, 사헌부 감찰 김철헌의 아들 김상기가 있다.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며 마주친 정혼남 김상기를 슬기롭게 물리치는 다희. 그녀의 가슴속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받은 파혼통지로 인해 자신마저 초주검이 되었던 원망과 배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결코 죄인의 집안과 혼인할 수 없는 아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김상기의 아버지 김철헌의 단호한 결정. 그 허탈과 배신의 극한 감정은 되려 허준을 향한 한줄기 믿음되어 오롯이 허준을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 장번사령의 일탈, 의도된 구성이 독자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
"그 파혼통지는 당시의 조정의 사세로 보아 우리 집안을 지키려는 아버님의 보신책이었지. 내 의사와는 다르오. 내게는 묻지도 않고 내리신 결정이셨소! 그걸 알고 나 또한 그 후로도 숱한 혼처를 물리치며 오로지......"
믿든 말든 순정이 오고 간 시대. 염량세태를 되돌아볼 일이다.
"사람 시켜 우리의 파혼이 통지 돼온 날 그 내용 보시며 이미 아버님은 밤쯤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아버님뿐 아니올시다. 여자에게 있어. 파혼이 무엇이오니까. 그 또한 여자의 죽음이옵니다. 옛날의 다희는 죽었습니다."
'신파극 홍도야 울지 마라'가 떠오른다. 극작가 이은성의 냄새가 짙게 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났단 말이오!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그 김상기를 무시하고 허준이 아내의 팔을 잡았다. 김상기가 쫓아오며 다희를 부르는 소리가 났으나 다희도 허준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
한양을 벗어나 고성서 진주까지 60리. 그 진주에서 다시 산음까지 또 60여 리. 진주에서 산음까지 가는 길은 추웠다. 새로운 삶의 터전과 명의 유의태를 만나기 위한 극적 여정이 녹녹지 않다. 허준은 아직 유의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다희로부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 나선 의원이 유의태란 말을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허우적허우적 2천 리를 찾아온 목적의 땅 산음이 눈앞에 펼쳐 있다. 품 안에 든 아버지의 서간을 확인하는 허준. 그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민호 3백60호 인구 2천2백여. 허준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새 천지 새 세상, 산음이다.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주신 서간을 전해 줄 이곳 산음 땅 현감 조상두(趙相斗)는 벼슬을 그만둔 지 두어 달이라는 이방의 말에 일행은 그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산음까지의 길고 긴 여정이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이다. 다른 일도 아닌 신분에의 탈출. 용천서 한양, 한양서 다시 고성, 고성에서 다시 첩첩산중 넘어 도달한 희망의 땅, 산음에 왔지만 의지처 하나 없는 신세. 이럴 때 무심한 하늘이지만 답은 준다. 그래서 하늘이 중요하다. 조력자 이방이 나타난다.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존 인물 허준, 1606년 양평군(陽平君)으로 봉해진 그는 (1530~1615 ) 조선시대의 의학자로 중국의 의학서 황제내경을 깊이 연구, 동의보감을 저술한 의성(醫聖)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호는 구암(龜巖), 묘(墓)는 경기도 파주 민통선 안에 있다. 허준박물관은 허준이 태어나 성장하고 의서(醫書)<동의보감>을 집필하다 돌아간 곳으로 알려진 서울 강서구에 있고, 경남 산청에는 테마공원으로 동의보감촌과 허준 순례길도 있다. 따뜻한 봄날 어느 곳이든 허준과 하루쯤은 같이 하고 싶다.(202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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