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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최인호의 장편소설 소설《길 없는 길》 제2화 대발심 (大發心)]

백두산백송 2024. 1. 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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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인호 길 없는 길, 여백 출판

[산문&감상: 최인호의 장편소설 소설《길 없는 길》 제2화 대발심 (大發心)]

♤ 제2화 대발심(大發心)

대발심(大發心), 경허(鏡虛)가 몸을 던졌다.  나라는 구한말, 역병이 돌고 있다. 천안을 거쳐 계룡산 동학사 만화 화상(和尙)을 찾아가는 길이 무간지옥(無間地獄)이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험난한 여정. 괴질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죄인이 따로 없다. 병들고 죽으면 다 죄인이다.

-죄인들이 서로 죽이며 뜨거운 고통을 받는 등활(等活 ) 지옥, 뜨겁고 검은 밧줄로 신체가 묶이고 수족이 끊기는 고통을 받는 흑성(黑繩) 지옥, 한꺼번에 많은 고통이 엄습하여 비명을 지르는 호규(號叫)지옥, 모든 것이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극렬(極熱)지옥, 고통이 쉴 새 없이 닥치는 아비(阿鼻)지옥,  그 모든 지옥이 합쳐진 아비규환의 무간지옥(無間地獄)이었다.-

중의 이름 경허(鏡虛), 속명은 동욱(東旭), 그의 속성은 송(宋)씨였다. 고향은 전주. 여덟 살의 어린 나이 때 소년 동욱은 아버지를 잃었다. 여덟 살의 나이라면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 있을 만하련만 동욱에게는 스승 계허의 기억이 친아버지처럼 더  많이 더 오래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어린 사미승은 계허와의 연을 잊을 수 없다. 후일 괴로워하면서도 연을 끊고 모든 것을 버린다. 심지어 글마저 버린다. 그래서 그런지 경허의 저서는 없다. 고승들끼리 주고받은 오도송(悟道頌)만 있을 뿐이다. 불가의 세계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 버려라. 버림은 모든 사유의 시발(始發)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도 같은 맥락이다. 경허(鏡虛)는 이를 철저히 실천한 선사(禪師)다.

아홉 살에 청계사에 입적(入籍), 스승 계허 밑에서 5년 동안 사미승으로 지내다가 열네 살의 나이로  청계사를 떠나 스승 계허의 도반인 만화 화상이 있는 동학사에서 17년을 머문다. 동학사에 온 지 10년, 그의 나이 23세에 이르러 당대 제일의 학장(學匠) 만화의 강원(講院)을 물려받아 교리를 강론한다. 그로부터 8년 지나 경허(鏡虛)는 스승 만화의 가르침과 수행으로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

경허를 훈육, 깨우치려 하지만 이미 경허는 그 경지를 넘어서 있다. 스승 만화가 경허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부처님과 제자 아미롯다의 이야기' 중 부처님의 말씀이다. 
 
-아니룻다야, 이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법이란 보시와 교훈과 인욕과 설법과 중생제도와 더없는 정법을 구함이다.  중생들이 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의 행(行)을  참으로 알고 바르게 한다면 결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삼악도(三惡道)란 악인이 죽어서 가는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말한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쁜 길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경허, 그는 누구인가. 불경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원각경을 벌써 다 외고 익힌 선사. 스승 만화의 경허에 대한 원각경 일절의 풀이 요구. 이에 술술 풀어 말하는 경허. 막힘이 없다.

-무릇 정법을 구하는 사람은 청정한 사람이나 허물이 있는 사람이나 일체 차별 없이 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 "아누다라 삼먁 삼보리", 즉 불과(佛果)의 지혜인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룰 수 있다. "아누다라 삼먁 삼보리"는 "세상 모든 일의 참된 내용이나 형편을 두루 알며, 최고로 바르고 원만한 부처의 마음 또는 그 지혜를 말한다, 이는 곧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인 불과(佛果) 임을 말한다.-

스승 만화는 경허의 말을 듣고 "불 속에서 연꽃이 피었도다. 아아, 화중생련(火中生蓮)이로다."를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하여 경허가 새로운 강백(講伯)으로 뽑힌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의 소문은 전국으로 번져 나가 수많은 납자(衲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귀의하기 시작했다.

동학사 강원(講院) 강백(講伯), 8년 세월이 흘러갈 즈음 경허는 계허 스승의 편지를 받고 청계사로 향하지만 이내 포기, 다시 동학사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 마저도 옳은 길이 아님을 깨닫고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를 다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온 학문은 하나의 감옥이다. -지금껏 배워온 모든 학문을 버려라.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모든 알음알이를. 내가 아는 학문은 한갓  얕은꾀에 지나지 않는다. 베어라. 그리고 끊어라.  그래야만 너는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나는 이제껏 모든 학문에 정통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상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이다. 이제야 내가 알았으니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를 비로소 알게 되었음이다.-

경허의 득도(得道),  부처님의 입멸 직전의 유언,
"부증설일자(不曾說一字), 나는 일찍이 한마디도 말한 바가 없다."란 말을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부처, 그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태자의  몸으로 왕국을 버리고 출가하여 목숨을 걸고 진리를 찾아 헤맨 끝에 출가한 지 6년 후, 서른다섯의 나이에 커다란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되었다.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그로부터 45년 동안 팔십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자신이 깨달은  최고의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쉬지 않고 설법함으로써 살아생전 팔만의 대장경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팔만가지의 대장경도그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열반에 들기 직전, 부증설일자(不曾說一字)와 같은 수수께끼의 유언을 남긴 것이다.

-나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다 버리고 진리를 찾아가야 한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뜻 모를 동진(童眞) 출가를 하였다면 이제 나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제2의 출가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진(童眞)이란 승려가 될 뜻을 가지고 절에 와서 불도를 배우면서도 아직 출가하지 않은 사내아이를 말한다.

경허는 정처 없이 떠난다. 이곳저곳 도량을 돌아다니며 천수경을 외치고 목어(木魚)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경허의 머릿속으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에 수록되어 있는 시경(詩經)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욕망이 불타는 생사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열반상락(涅槃常樂)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을 말한  불타의 노랫소리들이 경허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에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기라.-

정처 없이 떠돌이 스님이 된 경허, 안갯속으로 사라져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경허의 뒷모습. 선사가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 그 끝이 어디인지를 모를 일이로다.

《제1화》와 《제3화》가 일인칭 시점이라면, 《제2화 대발심》은 내화(內話)로 경허의 출가와 그의 일생을 삼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그리고 있다. 한마디로  경허의 일대기로 보면 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렇듯 줄거리를 요약 정리하며 《제3화》로 넘어간다.

《제3화: 내 마음의 왕국》에서 경허를 어느 절에서 우연히 만난 강교수. 어머니의 성을 따른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며 구구절절 어머니에 대한 울분과 애정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에필로그 《제3화》가 힐끗 내 눈을 쳐다보고 있다. (20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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