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필: 서울여정, 에스프레소 마키아또]
서울은 강한 바람이 불고 온도가 십도 이하로 뚝 떨어진다고 했다. 겨울용 외투를 걸치고 서울역에 내리자 바람이 조금 세게 불뿐 전형적인 가을날씨에 내리는 비도 그쳤다. 청와대 관람예약시간은 아직도 세 시간 정도 남았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지나 세종대왕을 거쳐 광화문으로 쭉 뻗은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이른 아침 관광객들은 무리를 지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마키아또를 주문했다. 여전히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믹스커피와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내가 마키아또를 직접 주문하다니. 그것도 에스프레소란 말과 함께. 참 많이 변했다. 내 입에서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란 말이 술술 나오다니. 달콤한 맛에 쓴 맛이 곁들어 있는 이 커피를 처음 주문할 때, 나는 이름을 몰라 "애썼소, 마카마~도"라며 한바탕 웃음 속 멸시를 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변해도 많이 변했다.
커피숍에서 혼자 커피를 마실 때는 이상하게 사람이 좀 변한다. 무슨 심각한 일이 없는데도 표정은 약간 심각하게 해야 하고, 별생각이 없는데도 생각을 하는 척해야 커피맛이 우러나온다. 이것이 혼자 커피를 마시는 낭만이라면 낭만이다. 갑자기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다. 실은 청와대가 보고 싶어 불쑥 떠났는데 서울하늘을 보는 순간 서울예수가 떠올랐다. 서울예수라니, '서울의 예수'는 시인 정호승의 시다. 시인으로서의 현실적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시 중의 하나가 '서울의 예수'요, 이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40년 지난 세월 속에 '서울의 예수'는 많이 변했을까. 비는 그치고 하늘은 가을하늘이지만 여전히 강풍은 몰아치고 있다. 달콤한 맛과 쓴맛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광화문 광장이 에스프레소 마키아또 맛이다.
'청와대, 국민품으로'란 안내서를 들고 차례차례 발걸음을 옮겼다. 1991년 지어진 본관, TV 속 용산 집무실이 겹친다. 공간이동의 역사적 의미는 후대 호사가들과 역사가들의 몫이다. 대통령관저 입구, 인수문(仁壽門) 세 글자가 관람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질고 장수하다'. 보기 좋게 용이 꿈틀거리는 관복차림을 한 외국인 한 명도 뜻을 헤아리 듯 현판글 '인수문(仁壽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어린이날 행사 때 영상으로 보았던 녹지원이 나타났다. 역시 동심의 잔디밭이다. 녹색은 언제나 희망과 꿈의 상징이다. 살짝 객수(客愁)를 달래며 영상을 담았다. 상춘재와 영빈관을 지나 오운정(五雲亭)에 올랐다. 나무숲 사이로 청와대 지붕이 보이고 광화문 광장이 두둥실 뜬 구름 되어 흘러간다. 오색구름 드리운 풍광이 서울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하늘도 나라도 오운정처럼 빛나면 좋겠다. 오운정을 푸근히 바라보는 통일신라 불상인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한 여인이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침류각을 스쳐 춘추관으로 빠져나왔다. 국민품으로 돌아온 청와대, 여전히 바람은 강하게 불고 하늘은 맑은 가을하늘이다. 녹지원 하늘에 흰구름이 보기 좋게 날고 있다. 달콤하면서도 쓴 맛이 짙게 배인 에스프레소 마키아또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본관 이층 집무실 봉황 두 마리가 눈앞을 스친다. (20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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