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상) 리뷰, <구침지희(九針之戱)와 분초사회(分秒社會) 제5화>]
-구침지희(九針之戱)와 분초사회(分秒社會)-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 20여 전 의원취재를 했던 유의태의 과거시험의 일화가 눈길을 잡는다.
당시 명종의 어의요 내의원 실력자였던 양예수와의 한판 승부. 유의태는 단순 젊은 날의 객기로 치부하고 있지만 내심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이요 한풀이였다. 소설 속 행간의 맥락을 보면 양예수보다 침술에서 한 수 우위임을 엿볼 수 있다. 유의태가 시험을 보긴 보았는데 자신의 위치를 두고 지레 겁을 먹은 양예수가 유의태의 시험답안을 고의로 분실케 하여 유의태를 낙방시켜 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시기와 질투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거나 쓴맛을 보게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신 또한 그렇게 당하는 것이 인간사다.
안광익과 유의태가 술잔을 기울이며 그 옛날 영움담으로 서로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유의태의 양예수에 대한 정면 승부. 유의태는 양예수와 침술 시합을 제의한다. 결국 양예수를 꺾어 버린 후일담을 엿듣고 있는 허준. 스승 유의태의 인물됨과 능력에 놀라 그저 벌어진 입을 닫을 수 없다.
허준, 안광익, 유의태.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이라. 세 사람이 함께 하면 그중에는 꼭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굳이 누구의 스승이라 할 것 없이 후일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참스승의 길을 간다. 아름다운 인생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당대 최고의 침술과 인체해부의 실증적 경험의 전수자 안광익. 안광익은 구침(九針)으로 호랑이를 잡은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닭과 개를 닥치는 대로 잡아가는 호랑이를 잡아버린 안광익. 그도 유의태와 같이 아홉 개의 침으로 만병을 다스리는 편작(扁鵲)이다. 살아 있는 닭에 아홉 개의 침을 푹푹 찔러도 죽지 않고 펄펄 나는 침술을 지닌 안광익. 아마도 두 사람은 구침지희(九針之戱), 일러 침술(針術)로 우정을 쌓았을 것이다.
'구침으로 호랑일 잡은 건 잠시 나의 기지였을 뿐 세상에서 나 못지않게 침을 잘 쓰는 유의태란 인물에 대해 보통 궁금한 게 아니었지."
유의태와 술잔을 마주하고 있는 안광익의 말이다.
생닭의 몸에 구침(九針)을 넣어두고 이를 호랑이가 삼키게 하여 호랑이를 잡은 안광익. 내의(內醫) 김민세에게 전해 들은 유의태와 양예수의 구침술(九針術) 한 판 승부 이야기. 안광익은 유의태의 침술에 대해 극찬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치켜세우는 공치사가 인간적이다.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 AI시대에 이런 "휴먼터치"가 깃든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한 축이 아니고 무엇이랴.
"구침지희(九針之戱).
아홉 개의 침술이 펼치는 재주. 그건 의원으로서는 목숨을 건 내기에 해당하는 무서운 재주 겨루기였다. 그 연원은 후한(後漢) 시대의 명의(名醫) 화타(華陀)에게서 비롯되는데 화타는 조제를 알 수 없는 마불산(麻拂散)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이를 술에 타 병자에게 먹인 후 개복(開腹)과 뇌 수술까지 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 화타에게 묻어 있는 전설의 또 하나가 구침지희와 오금희(五禽戱)로서 오금희란 화타가 오금(虎 鹿 猿 熊 鳥)의 자세와 동작을 본떠 창안한 독특한 체조인데 이를 실행한 제자들은 나의 90에 이르도록 청년 같은 기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 오금희와 함께 구침지희는 살아 있는 닭의 몸 안에 아홉 개의 각종 침을 침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찔러 넣데 닭이 아파하거나 죽어서는 안 되는 고도의 침술 경지를 제자들에게 시범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전설 따라 삼천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의태의 방으로 갑자기 불려 간 허준, 창녕 성대감댁 마님의 중풍을 다스리기 위해 스승 유의태의 명을 받아 침술의 기회를 얻는다. 유의태는 아들 도지보다 침술에 있어 허준을 더 믿고 있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가끔씩 한의원을 찾을 때는 허준이 떠오르고 오늘날도 침술의 명의를 말할 때는 모르긴 해도 허준을 입에 오르내린다. 한 때 한의대의 급부상으로 수지침, 장침, 봉침 등의 침술이 유행했지만 구침지희(九針之戱), 이제는 전설 속에 묻혀버린 소설 속 언어유희가 아닐는지.
분초사회, 저 멀리 허준이 창녕대감댁을 찾아가는 사이 내 눈은 또 《트렌드 코리아 2024》를 향하고 있다. 《소설 동의보감》과는 실로 대조적이다. 슬로 모션과 패스트 모션, 슬로 의술과 패스트 의학, 이런 말들이 성립한다면 두 축이 하나 되어 진일보하는 것. 절대가치와 절대기준이란 없다. 허준이 여유롭게 평생 처음 큰 갓 쓰고 큰 병을 다스리려 가마를 타고 가는 사이 김난도는 분초사회를 역설하며 현대판 소비트렌드를 설파(說破)하고 있다.
'분초사회, Don"t Waste a Single Second:Time-Efficient Society'
- 1분 1초가 아까운 세상이다. 시간이 돈만큼 혹은 돈보다 중요한 자원으로 변모하면서 "시간의 가성비"가 중요해졌다. 단지 바빠서가 아니다.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 이행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볼 것, 할 것, 즐길 것이 너무 많아졌다. 천 단위로 움직이는 현대 플랫폼 경제에서 시간의 밀도가 높아지며, 우리는 가속의 시대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나도 소설 동의보감을 보면서 동시에 《트렌드 2024》를 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김난도가 말하는 TV를 보면서 잡지를 뒤적이고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여러 가지 일을 저글링 하듯 돌려 막는 생활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바로 시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시간의 가성비를 극도로 중요시하며 사용시간의 밀도가 매우 높아졌다.'
그렇다. 잠시 눈을 돌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차는 차선을 물고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가 말하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도 얼마가지 않으면 지위를 상실할지 모른다. 한 가지 사물에 한 가지 적확한 어휘나 행위만으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대처하기란 위기를 느낀다. 자고 일어나면 똑 같이 일컫던 "사회"도 "분초사회"나 "나노사회"란 말로 바뀌어 있다.
김난도는 말한다. 사용시간의 밀도가 매우 높아진 진 것은 단지 바빠서가 아니라 소유경제에서 경험경제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이행하면서 시간이 돈만큼이나 유용한 자원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비싼 소유물을 과시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여행지, 맛집, 핫플레이스의 인증샷으로 자랑하는 시대다."
딱 맞는 말이다. 정확한 진단, 티스토리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 《트렌드 코리아 2024》에서는 이처럼 시간이 희소자원이 되면서 시간 효율성을 극도로 높이려는 트렌드를, 모두가 분초(分秒)를 다투며 살게 됐다는 의미에서, "분초사회"라고 명명한다. 분초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지상주의"를 떠받들며 시간의 가성비를 높이기 위해 1) 돈보다 시간을 중시하고, 2) 시간 사용 단위를 조각내며, 3) 여러 일을 함께 처리하고, 4) 일단 결론부터 확인한 후 일을 진행하며, 5) 실패 없는 쇼핑을 바라면서 극한의 시간 효율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렇게 분주하게 살면서, AI 시대에 반드시 필요해진 사색을 위한 여백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시간이 돈이다(Time is money)"라는 격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간이 돈만큼, 아니 돈보다 귀해졌다."
허준이 김난도의 말을 들었는지 가마를 타고 가다 힐끗 돌아본다. "시간이 돈이다". 급히 창녕현에 도착한 허준.
기다란 행랑을 지나 불을 대낮같이 밝힌 중문 안에 멎자 기다리고 있던 늙은 선비가 약재함(藥劑函)을 안고 내리는 허준에게 첫마디로 명령했다.
"따라오게. 우선 대감께 인사 올리게."
허준은 늙은 선비를 따라 노소의 하인배들이 줄줄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중문을 통과했다.
이 극적상황의 괴리, 《동의보감》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집대성하여 1610년에 저술한 의학서요, 《트렌드 코리아 2024》는 2024년 1월 10 일 초판 29 인쇄 발행, 지은이 김난도외 10명이다. 그리고 작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1990년 2월 25일 초판발행이다. 역설적이게도 상황의 괴리가 역사요, 인간사 희망이다.
저만치 허준과 김난도가 <육신과 정신의 병리서>를 주고받는 듯 악수를 하는 허상이 한 편 드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간다.(202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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