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책 읽기 & 감상

[산문&감상: 박기옥의 수필집 '아하' 리뷰1] -수필집 리뷰 이어가기1-

백두산백송 2024. 2. 19.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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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박기옥의 수필집  '아하' 리뷰 1]
-수필집 리뷰 이어가기 1-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늘 함께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세이든 독후감 또는 기행문이든 소위 일상사 잡문이든 구별하지는 않는다. 보기에 따라 일기 하나라도 내 눈에는 명작(名作)이요 명시(名詩)로 다가올 때가 종종 있다.

지역에서 쏟아지는 수필집이나 산필집 또는 에세이나 시집 또는 소설들이 한 달에 아니 일 년에 거의 100여 권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정확한 수치는 통계를 내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대충 문인협회에 등록된 부문별 분과가 시, 시조, 소설, 아동문학, 수필, 평론, 희곡 등 일곱 개 분과로 되어 있으니 각 분과별 한 해에 10권 정도 출판되면 대충 답은 주어지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출판된 책들이 출판과 동시에 저자의 수고로움을 통해 인연이 있는 문인들에게 전달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 유명서점 모퉁이를 한 두 달 지키다가는 이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지역 출판 소식의 현주소다.

이 말은 곧 각 장르별 동인들의 관심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 버림을 의미한다. 이후 애써 쓴 작품들이 박제되어 서랍 속에 잠들어 있거나 한 조각 폐지 내지는 폐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로 사람이 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보고 그리워하는 형국이다. 어쩌면 이것도 김난도가 말하는 2024 10대 소비트렌드의 하나인 '디토'(나도라는 의미의 Ditto)로 인한 쏠림현상인 줄도 모른다.

아깝다. 아깝다기보다는 아쉽고 안타깝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화려한 표지를 장식한 순간 베스트셀러 보다 값진 삶의 노래와 시와 언어들인데 이들이 그냥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현실이 아쉽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하여 비롯 베스트셀러는 아닐지라도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출판한 책은 이유를 막론하고 누가 나를 읽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읽히지 않는 책은 이미 책이 아니다. 비롯 서툴고 어눌한 작업일지라도 독자들의 손을 거쳐가는 한 권, 무명의 책을 위하여 나름 이들의 책을 다시 끄집어내고 싶은 것이 나의 욕심이다. 수장되고 있는 내 책들이 긍정적인 '디토소비'의 한 축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이 작업을 티스토리의 범주로 끌어들이고 싶다. 수필을 중심으로 한 소소한 삶의 이야기가 다름 아닌 내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명작임을 스스로 명심할 일이다.

네 번째 수필집 박기옥 님의 "아하", (출판: 박이사 아하 수필집 박기옥 2020.)을 감명 깊게 읽었다. 대표작 다섯 편을 단숨에 삼켰다.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인 글들이 나로 하여금 푹 빠져들게 했다. 잘 발효된 막걸리 한 잔에 희고 붉은 포도주 서너 잔을 함께 마셔버린 느낌이다.

짧은 듯 긴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문학평론가 한상렬이 그녀의 수필을 두고 "새로운 시각으로의 통찰은 코기토(cogito)와 함께 키치(kitsch)를 뛰어넘어 경계를 넘게 할 것"으로 극찬한 이유를 알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재미있다. 단순 재미가 아니라 탄탄한 논리와 사유의 깊이가 머리를 파고든다. 그 누가 "스스로 방치한 영혼"을 에둘러 그러면서도 이렇게도 맛깔스럽게 매듭 지울 수 있을까. "우리 배는, 나는", 몇 번이고 읽어 보는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새벽잠을 꿀물로 삼켰다. 글이 좋으니 사람도 포근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얼굴은 빈틈이 없어 보이는데 글은 왜 이리 재미있을까. 사람의 얼굴과 글이 주는 쾌락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무슨 함수관계란 것이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 안경 너머 살짝 웃음기를 띠며 내가 매고 있던 가방을 달라고 하던 그녀의 그 능청이 수필 《삼겹살과 프로이트》로 오버랩된다. "쾌락은 죽음에 종사한다." "프로이트를 위하여!". "깜짝 놀란 삼겹살이 서둘러 익기 시작했다." 이런 언어들이 살아서 뛰어나온다.

네 번째 수필집 《아하》의 대표작, 《오브제의 기억》 속 떡판 때문에 잠시 나는 그 옛날 《죽순》 가득했던 대숲 큰댁을 떠올려본다. 큰어머니가 그토록 오래 품었을 떡판, 명절 언저리에 대소가 모였던 한판 신명을 생각하면 《오브제의 기억》이 분명 나로 하여금 큰댁의 별호인 대궐 댁과 길 떠난 어머니를 소환하고 있다. "사물이란 항시 인간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생명력을 얻어가는 꿈틀거리는 생물임"을 깨우쳐 준다는 그녀의 말과 함께 빈방을 지금도 지키고 있는 어머님의 자개 문갑이 그리움으로 덧칠된다. 오래된 물건일수록 그리움의 빛깔이 이렇게 다양할 줄은 몰랐다.

《아하》 , 내가 나를 놓치고도 내가 나인 줄을 몰랐던 순간, 나도 "7번 방"을 돌아 간신히 내 방을 찾아간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뿐만이 아니다. 때론 7 이란 숫자에 함몰되어 로또 수 십 장을 몇 주 간격으로 집어삼킨 맹한 맨머리를 두고 얼마나 헛된 행운을 꿈꾸었던가. 부질없는 욕망, 사랑도 꿈도 허접한 내 일상도 이미 7이란 숫자와는 멀고도 먼 인생. 나에게는 비트코인도 로또도 없다. 다만 여기저기 구멍 난 자판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볼펜 똥이 《죽순》처럼 피었다 질뿐이다.

잠이 달아나 버린 새벽, 나는 "수필세계 68호"에 게재된 한상렬의 《경계 넘기, 무의식적 존재에 관한 코기토/박기옥의 아하》를 몇 번이고 읽기를 반복했다. "깊이 읽기"를 한 평론도 평론이지만 그녀의 대표작 다섯 편에 푹 빠져버렸다. 《아하》에서 초대받지 않은 헛된 자아를 되돌아보며 벌떡 일어나 《삼겹살과 프로이트》를 다시금 뒤집고 싶어 책장 속 《꿈의 해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오브제의 기억》 이 던지는 결코 잊지 못할 그리움들, 《죽순》같은 내 인생이 흘러가는 가운데 《나는 어디에서》를 읽고 또 읽으며 수시로 망각하는 "내 안의 나"를 두고 몸부림을 쳤다. "우리 배"는, "나는."

벌써 새벽을 지나 아침밥을 넘겨도 한참을 넘겼다. 먹지 않아도 배 고프지 않은 이런 날들이 내 기억에는 별로 없다. 글로써 아침밥을 대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살짝 소설 냄새를 풍기는 짧으면서도 긴 이야기에 허구를 입히고 의식의 흐름을 의도적 기법으로 치고 빠지는 노련한 글솜씨, 요리조리 "키치(kitsch)"의 늪에서 빠져나온 명품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그러면서도 격 높게 다가서는 이 글 맛을 어이해야 하나. 그때 그 청색 가방을 슬쩍 건네주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7번 방", "아하"에서 혼줄이 나간 내 영혼, 그래도 아침밥은 챙겨 먹어야겠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누구를 닮았을까. 버지니아 울프도 아니고 수필 《권태》의 작가인 이상도 아닌, 그렇다고 소피 마르소는 더더욱 아닌 "아하", 그녀의 이름은 "박기옥"이어라.

수필집 "아하"를 두고 한상렬이 말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의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좋은 수필, 수필의 길목에서 "아하"를 만난 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랴. "키치(kitsch)"로 물들어 있는 나의 수필인생이 환한 미소로 다가옴을 주체할 수 없다.

"코기토(cogito), 에르고(ergo) 숨(sum).: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2024.2.19.)


※참고:저자의 말

"다시 수필 몇 편을 묶는다.
정신분석과의 접목이다.
나의 수필이 프로이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오랜 시간 낯설어하면서, 힘들어하면서,
가까이도 못 가고 머뭇머뭇 주변을 맴돌았다.
너무 높고 놀라웠고 지금도 여전히 까마득하지만,
저질러 보기로 했다. 작업하는 내내 몹시 설레었다."

《박기옥 수필집《아하》/박기옥 저자(글)/학이사 · 2020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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