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출판:비채 2020.11.5. 1판 1쇄)
를 또 들었다. 시와 수필이 한몸으로 움직이니 감정의 굴곡 없이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몇 번을 읽어도 지겹지가 않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는 이 한마디 말이 그냥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한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두고 "부디 맛있게 잡수시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래서 맛있게 먹기로 했다.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짤게 썰어서 먹기도 하고 뭉티기로 먹어도 봐야 한다. 때론 급히 먹다가 체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수필이나 소설을 소화제로 먹으면 된다.
이 책은 각 1부 15편씩, 총 4부 60편, 594 페이지로 되어 있다. 시와 산문, 두 양식이 지니는 깊이와 무게만큼이나 두터운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이라도 지겹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제1부, 제1편>부터 나름 맛있게 먹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제1부 제1편: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2000년 새해가 막 지났을 때 부처님 태어나신 곳과 예수님 태어나신 곳을 찾고자 했다. 두 성인이 태어나신 곳을 가고 싶은 마음은 그저 겸손 그것이리라.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는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면적의 마야데비 사원이 철조망으로 쭉 둘러 쳐져 있었고 7미터 높이의 둥근 돌기둥에는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셨도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거룩하다고 여긴 성지가 마음에 걸리는 화자는 사원 정문 앞에서 흙으로 만든 부처님을 하나 사서 책상 앞에 두고 평소 산란한 마음을 다스린다. 법정의 무소유 속 난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애지중지하는 난초에 대한 걱정처럼 화자는 책상 위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 자칫 잘못해서 산산조각이 날까 봐 걱정한다. 화자는 "오지 않는 미래를 가불해 와서 걱정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끝내 새긴다.
평소 걱정이 많은 화자, 정호승은 "오늘에 살지 못하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늘 안절부절못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어느 날 시적 상상력 속에서 부처님을 만나 머리를 한 대 맞는다.
"이, 바보 같은 놈아.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은 것이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노?"
순간, 부처님의 그 귀한 말씀이 불화살처럼 가슴에 박혀 쓴 시가 <산산조각>이라는 시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라고 했다. 꿈속 부처님의 말씀이라지만 이는 곧 시인의 말이요 삶의 자세로서 집착과 아집을 버려란 말이다. 더군다나 순간접착제는 부처님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게 만드는 행위다. 어쩌다 실수로 산산조각 난 부처님도 부처님이다. 한마디로 '현상과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
'산사의 범종에 금이 가면 총을 칠 때마다 깨어진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종이 완전히 금이 가고 깨어져 산선조각이 나면, 그 파편 하나하나를 칠 때마다 제각기 맑은 종소리를 낸다. 깨어진 종이 파편이므로 깨어진 종소리가 나리라고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다. 깨어진 종의 파편 하나하나가 제각기 종의 역할을 한다.
내 삶이 하나의 종이라면 그 종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 난 내 삶의 파편을 조용히 거둔다. 깨어진 종의 파편 파편마다 맑은 종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득도의 경지, 시인이 부처님 태어난 곳을 찾아간 이유를 알겠다.
정호승은 '나는 스물세 살에 한국시단에 등단해서 그동안 13권의 신작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약 1천 편 정도의 시를 쓰고 발표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내 인생에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내 인생을 위로하고 위안해 주는 단 한 편의 시를 꼽으라면 바로 이 시 <산산조각>을 손꼽을 수 있다.
내가 쓴 시 중에서 내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단 한 편의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산산조각>이다.'라고 했다.(20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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