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진천 버드네 마을과 리퀴드폴리탄-
의원취재, 다시 말해 내의원 자격시험을 치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길목, 충청도 진천 버드네 마을의 풍경이다. 의원하나 없는 마을, 병자인 아버지를 둔 한 여인의 간절한 호소를 뿌리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날이 새면 취재에 남는 여유는 이틀 반, 한양까지 2백60리. 하루 1백30리씩 이틀 안에 달려가야 한다.
의원시험이 채 사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버드네 마을 환자를 돌보고 있는 허준의 인간됨을 나는 경외한다. 의원 하나 없는 고립된 산골 버드네 사람들의 성화에 붙들려 환자 치료에 정성을 다 하고 있는 허준. 환자들이 들끓는 마을의 심각성을 알고도 모두가 과거길을 떠났지만 허준은 환자들을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순진무구하다고나 할까, 우직하면서도 거침없는 그러면서도 섬세한 그의 태도를 두고 내 마음은 왔다 갔다 한다. 아마도 이러한 허준의 일거수일투족은 작가 이은성의 의도된 구성에 따른 창조적 행위 인지도 모른다. 실존 인물에 대한 허구적 개연성이 이처럼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면 극작가로서의 이은성은 다시금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힌 셈이다.
이은성이 남긴 유일한 소설 동의보감. 빤히 보이는 주제를 두고, 아니 입지전적인 한 인물의 전형임을 알면서도 나는 왜 소설 동의보감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가. 아마도 이것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도전, 저쪽 한편에 대한 끝없는 동경, 그에 따른 숭고한 허준의 인간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의원 취재를 향한 집요한 뚝심, 면천, 신분에의 탈출, 뭐 이런 창조적 에너지로써의 도파민이랄까.
"한 사람만이라도 더"!
허준의 이 말 한마디가 바로 허준의 인성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두고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훈훈한 인간성, 이것을 두고 김난도는 화룡점정, 휴먼터치를 이야기했다. 사람살이의 근본 핵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에 의해 살고 사람에 의해 죽는 것이 인간이다.'
밤새 환자를 돌보느라 새벽달이 뜬 줄도 모르는 허준. 하지만 그는 여기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의원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리라. 아팠던 사람이 나와서 돌아가는 모습, 나을 수 있다는 밝은 희망을 지닌 얼굴, 병자마다 부모요 집안의 기둥인 남편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요 자식일 때 가족들의 그 기뻐하는 얼굴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뿌듯한 보람이었다.'
"한 사람만 더!"
사람이 사람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인간 존엄성의 가치는 극대화된다. 아마도 내가 허준을 쉽게 떠나지 못한 이유, 그것은 낮은 자존감에서 허우적거리는 스스로의 페이소스에 대한 자책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끝없는 동경, 화룡점정을 향한 휴먼터치, 김난도가 말하는 《2024 소비트렌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적 지점과 일치하기 때문이리라.
우직하고 사려 깊은 성격 때문에 내의원 취재를 놓쳐버린 허준. 유의태의 아들 도지는 합격했고 본인은 시험도 보지 못했다. 저 멀리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는 허준의 마음을 나는 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버드네 사람들. 그는 낙방 후 다시 돌아가는 발길을 버드네 마을로 돌린다. 처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드네 마을 환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의원으로서의 윤리, 역시 '사람이 먼저다'. 영광의 빛이 내리고 상서로운 기운이 돋아나는 허준의 숭고한 의식이 독자인 나를 사로잡는다.
'사람 때문에 살고 사람 때문에 죽는 것이 인생이다.' 허준을 바라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 말 한마디다. 이 단순한 명제 하나를 깨닫게 한 소설 동의보감에 나는 감사한다.
버드네 마을 환자를 돌보느라 내의원 취재를 놓쳐버린 사연이 빛을 발한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허준은 스스로를 잉태한다. 허준이 허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충청도 진천 버드네 마을, 이 마을은 허준으로 하여금 부활의 공간요 생의 분기점이다. 고립된 마을, 타인의 출입이 거의 없는 이곳 버드네 마을에서 행한 허준의 숭고한 희생과 의술은 입에서 입을 타고 방방곡곡으로 흘러갔다.
'한양 가도에 떠들썩하게 번져간 소문. 내의원 취재에 향하던 한 인물이 충청도 진천 일대에서 가난한 병자들을 구원해 주느라 취재의 기회도 스스로 버렸는데 그 의인의 이름이 허준이란 젊은 의원이다.'
시대는 변했다. 정주인구보다 관계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김난도의 《2024 10대 소비트렌드》의 하나인 리퀴드폴리탄 (ElastiCyty. Liquidpolitan).
'사람들이 정주하는 "고정된 도시"에서 다양한 구성원들이 어우러지는 "유연한 도시(Liquidpolitan)"로 도시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도시는 멈춰 있지 않다. 지역만의 콘텐츠가 흐르고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사람들이 이동하며, 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축적하는 새로운 변화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지역의 특성화된 콘테츠를 따라 움직이는 삶의 시대. 유연한 도시, 집은 경남 산음인데 허준이 충청도 진천에 가서 환자를 돌보거나 진천 버드네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산음땅을 찾아 나선다.
'이제 100개의 도시는 100개의 정체성을 가진 개성 있는 리퀴드폴리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정체되지 않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민과 관이 이인삼각 할 수 있는 긴밀한 협업 체계가 긴요하다.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인구 소멸지역을 살리는 것에서 나아가 다양성과 창의성 측면에서 성장판이 열리는 도시를 만드는 일이다. 각자 다른 매력으로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현하는 실험은 작지만 강한 리퀴드폴리탄이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허준의 시대는 정주인구가 지배하는 집성촌의 시대였다. 김난도는 말한다.
'KTX, SRT, GTX, UAM 등 지역 간의 기동성을 극대화시키는 교통의 발달과 유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플로팅(floating)세대의 등장은 리퀴드폴리탄 개념의 지역개발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고 했다. 신개념의 소형 리퀴드폴리탄이 많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시대, 지역마다 단순 유동인구가 아닌 관계인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유연도시로 거듭나야 지방도 살고 나라도 산다.
허준이 남긴 업적, 경남 산음에는 동의보감촌이 있다. 동의보감촌이 그냥 관광지가 아닌 리퀴드폴리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대단위 한방의료타운을 조성, 관계인구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지방분권화로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자 하는 일련의 사업이 바로 리퀴드폴리탄 사업의 하나다. 실제로 대구 반월당 약전 골목은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의원시험은 쳐보지도 못했지만 시험을 보러 가는 길목, 충청도 진천 버드네 마을에서 보여 준 허준의 사람됨이 의원 되기 이전에 입소문을 타고 흘렀다. 그만큼 의원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허준과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들의 인심, 자연스럽게 관계인구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산음 땅은 이름나기 시작했다.
"저. 집이 허준의 집이데이."
곧장 가던 길도 돌아 나와 사람들이 산비탈 보잘것없는 허준의 집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체 그 허준이란 의원이 사는 산음이란 데가 추풍령 이쪽인가 저쪽인가?"
"이런 무식한 것 봤나! 산음이 강원도땅이지 추풍령고개는 왜 나와!"
"우리 외갓집이 거창입니다. 허준이 사는 산음과는 바로 도랑 하나 사이라예."
충청 버드네 마을과 경상도 산음 그리고 과거를 보기 위해 갔었던 한양 땅을 떠올리며 허준은 잠시 묵상에 잠긴다.
교통수단 하나 없이 오고 간 천리 길, 호적(戶籍)은 경상도 산음이지만 그가 먹고살 길은 조선팔도 방방곡곡이다.
허준이 김난도가 말하는 《2024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의 하나인 《리퀴드폴리탄》 이란 말을 들었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I already tried Liquidpolitan!", "Elasticyty. Liquidpolitan"("나는 이미 리퀴드폴리탄을 시도해 봤어요!", "유연도시".)
'《2024 트렌드 코리아》에서는 도시의 유연한 변화를 <리퀴드 폴리탄(Liquidpolitan)>이라고 명명한다. 액체라는 뜻의 리퀴드(Liquid)와 도시를 의미하는 폴리탄(Politan)을 합쳐 현대의 도시와 지역이 액체처럼 유연하고, 서로 연결되며,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가변체라는 점을 강조한 명명이다.'
의원취재는 떨어졌어도 인심이 산음 땅 허준의 집을 뜨겁게 감싸고 있다. 허준은 또 살길 찾아 밀양 등지를 떠돌아다녀야만 한다. (20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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