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 책 읽기 & 감상

[산문&감상: 해빙, 그것은 구도자적 삶의 결정체였다.]

백두산백송 2024. 4. 24.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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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舊宅 퇴계선생구택

[산문&감상: 해빙, 그것은 구도자적 삶의 결정체였다.]

'1 일 1 수필 산책'을 생활화하고 있다. 수필사랑의 일상이 문학사랑이 되고 문학사랑이 내 마음의 산책이 되면 좋겠다. 수필은 나를 짓고 나는 수필을 짓는다. 짓는다는 말은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말이다.

얼마 전 늘 '복을 지어라'란 의미의 '조복(造福)' 두 자를 부적처럼 써다가 돌아가신 이근필 옹이 있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종택의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지키면서 한 세월 온몸으로 이황의 정신세계를 무릎 꿇고 실천하시다가 갔다. 내방객을 무릎 꿇고 경(敬)으로 대한 도학자의 실천적 자세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친필 '조복(造福)'이란 부적 같은 종이 한 장이 책갈피에 아직도 있다. 잘은 모르지만 도학의 핵은 실천궁행 '경'(敬)에 있다.

이처럼 복도 '조복'이란 말로써 복을 만든다. 즉 복을 짓는다는 것이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수필에는 늘 사람이 있고 사람의 일상사가 있다. 복도 지어야 하듯 사람의 문학인 수필도 지어야 한다. 특히 수필이란 장르는 사람 바탕의 사람 중심 문학이다. 수필에 '나'가 '우리'가 빠지면 수필은 수필이 아니다. 복을 짓는 마음으로 수필도 정성을 다할 때 수필다운 수필이 될 수 있다.

오늘은 수필가 이숙희의 수필집 《해빙》, (우리 시대의 수필 작가선/ 수필세계사/ 2023)을 '1일 1 산책 수필'로 택했다. 수필집 《해빙》에 실린 수필 <해빙 1>, <해빙 2>, <해빙 3>의 내용을 간추려 보자.

<해빙 1>
군입대 후 상병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무 반장이 된 아들 이야기다. 병장이 채 되기도 전에 왕고참이 된 아들이 기대와는 달리 이등병과의 충돌로 사고를 친 이야기다.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친 필자인 나로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금방 감이 왔지만 엄마인 화자는 황당했으리라.

상병인 아들과 내무반에 갓 들어온 이등병과의 한판 주먹다짐은 이등병의 코뼈가 금이 가면서 일은 심각하게 꼬여 버린다. 군내부의 싸움은 늘 그렇듯 하극상으로 시작되어 피를 보는 것은 선임이다. 자존심이 상한 이등병은 전혀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상병인 아들을 헌병대에 고발해 버린다. 졸지에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는 아들 때문에 급히 군으로 불려 간 엄마의 기지와 진심 어린 하소연이 끝내 이등병의 마음을 돌리며 아들의 위기를 모면한 일화다. 일화의 핵심은 '용서를 통한 해빙'이었다.

-"쓸데없는 오기를 뿌려 죄송합니다. 어머님!

나는 이등병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느 상관의 협박에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그다.

"아니야. 내게 마음을 열어줘서 정말 고마워.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일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일 거야.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그토록 피 말리던 사건은 일주일 만에 종결되었다. 아들놈은 상해죄, 이등병은 하극상이란 덫이 씌워졌지만,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해빙 2>
<해빙 2>의 소제목이 《담 안에서 온 편지》다. 평소 수감소를 찾아 교화의 한몫을 봉사하고 있는 화자에게 전달된 감사의 편지다.

딸 둘을 둔 가장이 순간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여 사람을 죽인 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무기수. 비록 무기수지만 철창 속에서 친형제처럼 지냈던 동료와의 갈등을 고백하며 마음의 평정을 얻어가는 이야기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동료지만 화자의 수필 <해빙 1>을 읽고 감명을 받은 그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죄를 짓지 않는 것과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교도소 내에서 화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마리아 자매님으로 불린다. 마리아에게 무기수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 님의 수필 <해빙 1

>을 읽고 이제야 사람답게 사는데 진정 가치로운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료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지 못해서 외롭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 나약한 영혼을 지켜주는 골리앗을 쳐부순 다윗의 작고 단단한 흰돌을 하나 얻은 느낌입니다.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침저녁으로 두 손을 모으는 일뿐입니다. 이 기도 항아리를 가득 채워 마리아 자매님의 몫으로 고스란히 봉헌하겠습니다."

<해빙 3>
역시 수필 <해빙 1>을 읽고 감명을 받은 한 무기수가 여섯 살 때 가출해 버린 어머니의 면회를 받아들인 이야기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못 이겨 아예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단념해 버린 무기수. 그 후 어머니가 아들의 소식을 듣고 면회를 몇 번 시도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던 수감자의 고백을 화자는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일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이라는 수필 <해빙 1>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열흘 만에 다시 면회 온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다. 44년 만의 만남이었다.

"용서해 다오.  죽기 전에 너에게 용서를 빌러 왔다."

"아닙니다. 44년이 아니라 440년 만에 오셨더라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된 죄를 용서하십시오."

회한의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어머니의 고달픈 육신의 흔적이 그제야 보이기도 했다. 삶을 견뎌낸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이라며 어머니를 용서하게 되었다. 용서만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랑의 젖줄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또다시 L 씨의 편지가 왔다. 지금까지 오고 간 편지가 수백 통이나 되지만 이번만큼 짧은 편지는 처음이었다.

"갈등과 대립을 화해와 용서로 바꾸고 나니 지옥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서평:《해빙, 그것은 구도자적 삶의 결정체였다.》

이숙희의 수필집《해빙》으로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수필집 표제는 '해방'이 아니고 '해빙'이다. 해빙은 단순 얼음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 의미로서 관계회복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모든 관계에서 빚어지고 결국 해빙으로서 마무리될 때 카타르시스는 정점을 치닫는다. 표제가 《해빙》이다 보니 1부에서 5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며 작가의 삶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결국 《해빙》은 곧 작가 이숙희의 삶 그 자체다. 표제를 잘 선택함으로써 전체 글이 생명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제1부는 <오지랖> 여사로서의 희생과 봉사가 핵이다. 타고난 심성과 결부된 신성은 작가의 삶의 철학이 어디에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제2부에서 4부까지의 세세한 이야기를 아우르는 전체 주제를 제1부에서 툭 던져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5부에서 모든 삶과 철학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툭 찍어버린 화룡점정이 바로 《해빙》이다. 관계회복의 <해빙 1>로서 시발점은 아들과 이등병의 관계회복이다. 긴장감도는 서사를 풀어간 작가의 심성에 소리를 지르며 공감한 내용이 <해빙 2>와 <해빙 3>이다.  수필집 《해빙》을 읽고 나도 똑같은 공감 속에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

제1부에서 시작된 묵혔던 글과 글맛이 제5부에서 정점을 이루며 끝내 작가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로써 인간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신성과의 관계를 매듭지으며 마지막 작품으로 <미리 쓰는 유서>로써 내 몸을 그대로 헌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수필집의 종지부를 찍고 있다. 이는 곧 모든 것이 '해빙'된 상태에서 오는 우주와의 관계회복을 의미한다.

'해빙',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가 간절히 요구하는 가장  절박한 단어 중 하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자들이여, 수필집 《해빙》이 던지는 작가의 삶과 철학이 깃든 은유를 깊이  읽어 보라.(2024.4.24.)

-수필집 해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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