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감상: 난세를 생각하다]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 가면 화양동 계곡이 있다.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무이구곡에 버금간다 하여 우암 송시열이 아홉 개의 구비마다 이름을 붙이면서 화양구곡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계곡 따라 풍광 좋은 제4곡 언저리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암서제(巖捿齊)가 있다. 암서제는 계곡을 바라보며 물 따라 바람 따라 강론을 하거나 풍류를 즐긴 정자라 보면 된다. 이 정자 밑 반석에 송시열이 읊었다는 한시(漢詩) 하나가 새겨져 있다.
溪邊石涯壁 계변석애벽
作室於其間 작실어기간
經坐深經訓 경좌심경훈
分寸欲蹄攀 분촌욕제반
溪邊石涯壁 (계변석애벽)이라. 실제 가보니 계곡 물길 따라 바위벽들이 눈에 들어오는 절경이다. 그야말로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물 따라 병풍처럼 펼쳐진 열린 바위가 비단 화양구곡 중 제4곡 금사담(金沙潭)에만 있겠는가마는 기암괴석 바위들이 아마도 송시열의 눈길을 사로잡은 듯하다. 바위도 바위지만 4곡 물길 속 모래가 금빛이라 4곡을 금사담이라 불렀다. 자연을 바라보는 고인의 눈길이 그만큼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리라.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자로서 주자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주희의 학문에 심취한 인물로 보면 된다. 이런 고귀한 인물들도 예나 지금이나 당쟁과 정쟁의 희생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귀양을 간다. 송시열도 백과사전이나 나무위키 등의 사료에 따르면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문제로 상소를 올린 것이 죄가 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아마도 제주도로 가기 전 관직에서 물러나 화양동 계곡에 2년 여 머물게 된 듯하다. 이때 구곡의 절경을 벗 삼아 강학에 힘쓰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고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공주에서 사약을 받고 만다. 학문도 명예도 시류에 역행하거나 사람 따라 물 따라 유명을 달리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고전을 통한 인문학이 주는 삶의 예지가 때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이런 류에 있는 듯도 하다.
작실어기간(作室於其間)이란 이 절경 속에 지은 암서제를 두고 한 말이다. 바위 속 서제를 생각해 보라. 그냥 멋있게 느껴진다. 바위틈을 흘러가는 계곡물은 금빛모래로 빛나고 기암괴석 우뚝 선 바위를 바라보는 송시열. 서제에 앉아 경서에 심취되어 고인의 발자취를 따라갔던 송시열의 일상이 바로 經坐深經訓(경좌심경훈)이요, 分寸欲蹄攀(분촌욕제반)이다. 이 높은 경지를 무지한 내가 어이 알리요.
경기도 파주 교보 문고 앞에는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돌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평소 내 생각과 같으니 크게 공감이 갔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결국은 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 스스로를 찾아가는 작업, '경좌심경훈'도 '분촌욕제반'도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때론 고인의 경지가 못내 부럽고 부끄러울 때가 있다.
주말 내내 물폭탄이란다. 연일 장맛비와 집중호우로 천지가 물난리다. 맞춤형 인간, 맞춤형 독서, 맞춤형 폭탄세일, 맞춤형 인테리어 등을 강조하다 보니 장맛비도 맞춤형에 물든 탓인지 집중호우로 변한 것 같다. 구석구석 찾아가며 하늘과 땅과 사람을 다스린다. 하늘에는 미세먼지, 땅에는 집중호우, 바다에는 쓰나미. 참 살기 힘들다. 어지럽다. 난세를 난세라 말하기조차 힘들다. 그래도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들며, 선인의 발자취는 살아있다.
언젠가 갔던 화양구곡은 잘 있을까. 바위 틈새 암서제는 그대로 일까. 조용히 서제에 앉아 경서에 빠져 선인의 경지를 쫓아 난세를 극복할 시대의 위인은 없을까.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내린 벌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니라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한 한시 한 구절을 생각하며 난세를 구할 위인을 소망해 본다.(202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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