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감상: 쪽지 한 장]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그가 나에게 쪽지 한 장을 전했다. 야릇한 미소를 남기며 조용히 그는 일어서고 있었다. 그와 나는 평생 함께 해 온 벗이라 직감적으로 그가 남긴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늘 나에게 말했다.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그의 성격은 변화를 좋아하고 진득하니 한 곳에 눌러앉아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없다고. 그가 나에게 진심으로 쏟아낸 숱한 말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는 분명 편집증 조현병 환자가 아님에도 한 곳에 뇌를 집중하는 그를 보면 가끔은 섬뜩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다. 그가 남긴 쪽지글 치고는 조금은 긴 글이지만 이를 공개하는 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며 쪽지글을 훑어본다. 역시 예상 한 대로다. 평소 청산을 동경한 그이고 보면 그리 마음 졸일 일이 아니다. 살짝 비켜보니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청산별곡이다. 고려속요인 이 노랫말을 흥얼거리면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청산을 지향하는 삶이 곧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를 머금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야 새여
한 세월 시름없이 사는 인생이 어디 있으리요마는 너보다 시름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서 운다.
뒤돌아보니 참으로 긴 세월 한 곳 한 자리에서 살아왔다. 어린 두 자식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살아온 집이고 보니 어디 한 모서리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단독주택 이층에서는 곡소리가 났다. 예순을 갓 넘기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삼 년 여를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휑한 주택골목에서 날밤을 새우며 마지막 꽃길을 뜬눈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근 30여 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한 장례식이 또렷이 떠오름을 어이하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우니노라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을 앞서 보낸 어머니가 이층에서 잠시 고요한 일상을 찾아갈 무렵 딸은 대학을 갓 입학했고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음울한 집안에 냉기가 돌고 어디 한 구석 밝은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그렇게 긴 밤을 자고 일어나 울고 지낸 세월이 구름같이 흘러가고 있다.
-가던 새 본다. 가던 새 본다. 물아래 가던 새 본다.
어디 보금자리를 옮겨 볼 여유는 금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출근하는 나를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고 아들 딸은 어느 구석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둘 여유란 없었다. 그렇듯 세월은 흘러 어두운 골목길에도 별빛이 쏟아지고 지상철이 들어서면서 황금들녘에 황금역이 자리를 잡을 즈음 딸은 어미가 되었고, 아들은 직장을 잡아 결혼 후 휘파람 휘날리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갔다. 그 후 한숨으로 날밤을 함께 지새우든 어머니도 부러진 대퇴부를 안고 몇 해 전 가시고 말았다. 저 멀리 물아래 날아간 새들을 떠올려 보니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닌 것 같다.
-물아래 가던 새 본다. 물아래 가던 새 본다. 이끼 묻은 쟁기를 가지고 물아래 가던 새 본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이곳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가.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이끼 묻은 쟁기가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 못한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내 운명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결코 좋아서 흥얼거리는 후렴이 아니다. 가고 싶다.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청산으로 가고 싶다. 훌훌 털어 버리고 가고 싶다. 겨우 깃든 잠시의 여유는 늘 두렵기만 하다. 절반보다 많았던 서글펐던 일상들을 더 이상은 겪고 싶지 않다. 한 세월 접고 저 멀리 청산으로 가고 싶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랄라.
열차가 부산역을 들어서고 있다. 차라리 쪽지글을 읽지 말 것을. 그가 언제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의 그림자를 쫓아 금정산성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싶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2024.9.5.)
'[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수필&감상: 답이 없다] (67) | 2024.09.11 |
---|---|
[자작수필&감상:오이찬국] (47) | 2024.09.07 |
[자작수필&감상: 호모 비아토르를 생각하다] (51) | 2024.08.26 |
[자작수필&감상: 문학의 메카를 꿈꾸며] (107) | 2024.08.16 |
[자작시&감상: 신천 폭우] (102) | 2024.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