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감상: 가을이다]
가을이다. 귀뚜라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어둠이 내린 창가를 바라보며 가을향을 맡아본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지만 이별의 계절이기도 하다. 절로 나오는 노래, "가을엔~떠나지 말아요~하얀 겨울에 떠나요~~." 계절이 노래를 반기고 노래가 계절을 손짓한다.
샤르도네 프랑스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센강에 도착한 시간은 센강이 저녁놀과 춤을 추는 때였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만물은 훤히 보이지만 빛나지는 않는다. 어둠이 살짝 내리고 만물이 고개를 살포시 숙일 때 만물은 빛난다. 그것도 아름답게 빛난다. 그녀도 나도 빛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녀와 함께 밀랍인형 에펠을 바라보며 사랑에 젖어 있었는지 모른다. 가을밤 풀벌레 소리가 이어지는 강변을 따라 이국적 정취에 빠진 내 혼이 그녀를 불러낸 것은 어쩌면 다행한 일이었다. 에펠탑 저편 불륜의 광장이 꿈틀거리고 한 모금 포도주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녀는 내 가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결코 돌아 설 수 없는 운명의 세레나데는 끝내 한 병 포도주를 바닥 내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포도주도 그녀도 강물 따라 흘러가버렸다. 그때 그 가을, 나는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이 지면 서러운 마음이 더할 것 같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그러면 눈길을 걸으면서 옛일을 잊을 것입니다.
거리에는 어둠이 내리고 안갯속에는 가로등이 하나인데, 비라도 우울하게 내린다면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버릴 것 같아요.
그러니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오늘따라 창문을 비집고 흘러가는 가사가 사람의 마음을 또 뒤집어 놓는다. 젊은 날에는 왜 그리 이별이 많았던지. 섣부른 용기가 이별을 낳고, 오만과 편견이 이별과 손 잡고 어지럽게 지냈던 날들이 가을이 되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별이 고귀한 희생인 줄을 알고 이별에 이별을 거듭했던 가을이 아니었던가. 젊은 날의 센강 변, 포도주의 상큼한 맛이 인생의 전부인 양, 강변 따라 흘러갔던 추억이 마구잡이로 소환되고 있다. 이별, 이별은 언제나 찬란한 비굴이요 자폐적 도피처일 뿐이다. 이별을 말라. 그것도 가을에는 이별을 말라. 그러면 겨울에도 꽃비가 내린다.
가을엔 사랑하라. 사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풀벌레 울음 속에도 있고 떨어지는 낙엽에도 있다. 특히나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 갈피에도 사랑은 숨어 있다. 이별로 남는 것은 미련과 후회와 상처뿐이다. 이별은 특효약이 아니라 거듭말하지만 그릇된 판단과 오만, 그리고 섣부른 자만에서 오는 특이한 상처를 남기는 독약 중의 독약이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202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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