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 늦가을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하늘을 즐기고 있다. 코스모스의 꽃말 ‘소녀의 순정’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소녀가 가을바람에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제일 처음 만든 꽃이 코스모스요, 처음 만들다 보니 모양과 색을 요리조리 다르게 만들어보다가 하늘하늘하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꽃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꽃이 코스모스란다.
아름다운 코스모스꽃 전설이 수성못 둘레길을 수놓고 있다. 이렇고 보니 아담한 수성못도 소녀의 순정을 닮은 듯 수줍게 일렁이고 있다.
지난밤 나는 순수를 잃은 말들을 두고 한밤 내 잠을 설쳤다. 몸도 마음도 아프다.《생(生)이 만선이다》, 박복조 시인의 시집을 들었다. 만선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만선이라면 언젠가는 비워야 한다. 살아온 날들이 길다. 결코 구질구질한 삶은 아니지만 기어이 정리하고 가야 할 길이 우리들 삶의 길이다. 어지러운 일상, 그래도 수성못 코스모스 꽃길 따라 하나 둘 말의 그늘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고 싶었던 던지고 싶었던 드러내고 싶었던 마음의 말들이 A4용지 저 너머 내 마음 구겨질 때, 그녀도 나도 몸부림치기는 마찬가지다. 응어리진 고운 말들, 그 말의 그늘이 살아날 때 세상은 지구를 떠 받친다. 또 그런 용심으로 시인이 한밤 내 우는 것은 그녀의 의무요 사명이다. '말의 그늘'이 살아나고 있는 것은 마음이 다시 솟구치는 생명력이리라.
원초적 욕구, 이드의 시원이 한 줄기 빛으로 되살아나는 떨림, 내 마음도 살아나면 좋겠다.
말의 근원은 어디에서 올까.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마음이다. 말의 그늘이 깊어질수록 마음도 점점 더 아파온다. 그러나 생각도 마음도 스스로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과 마음이 정화될 때 말의 그늘도 허물을 벗고 제자리를 찾는다.
♤그늘이 살아나고 있다/박복조
앓던 것,
꽉 잡고 구겨 던진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찌그러져
소리치며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A4 용지
마지막 꽃이라도 한번 피워보자고
춤사위로, 꽃잎 벌어지고 있다
잉크자국 얼룩덜룩한 몸
마음으로 그렸다가 지워버린
말의 그늘이다
종이 뭉쳐 다시는 안 볼 듯 던진다
한밤 팽개쳐진 말들이 벌떼같이 일어서
끌려가며 소리친다
가슴에 꼭꼭 박아두었던 말들
팔을 휘젓고, 구겨진 계곡을 떠밀며
깨알 같은 소리로 울부짖는다
이미 폐기한 쓰레기라고 하는데도
살려달라고 한다
솟구쳐 오르던,
주체할 수 없었던 말들이
울며 매달린다
버려진 말을 품어 키우던 가슴이
먹먹해, 울음이 차여
깎고 둥글리며 쓰다듬던 말들
다시 살아나고 있다
어둑한 첫새벽, 방바닥에 버려진 말들이
우련히 더 맑아 가야금 소리 청아하다
꽃피어오르는 구겨진 종이,
두 손을 짚고 일어서
애원하며 다가오는 말들
그늘이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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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조의 시는 구심의 지향과 원심적 욕망 사이에서 독자적인 떨림과 울림의 정점을 최전선에서 들려준다는 점에서 감동적 서정시로서 고유한 빛을 뿌린다.
그의 시는 근원적으로 시인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길과 끝내는 가야 할 태고를 넘나드는 시간예술로서 다가온다. 아름답고 애잔하고 당당하고 용융하다. 박복조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그러한 원리를 심미적 표상으로 담아낸 빼어난 미학적 사례일 것이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202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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