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필레시피: 3호선 여정, 수성구민운동장역]
대구 수성구민운동장역이다. 주변에 수성구민운동장이 있다는 이유로 붙여진 역명이다. 수성구민으로서 궁금하여 한 두 번 찾아갔던 수성구민운동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순진하게도 20여 년 전 그곳에 갔을 때, 나는 수성구 구민을 위한 운동장은 여기뿐인 줄 알았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월드컵 경기장도 생기고 각종 주민단위의 운동시설이 생기다 보니 오늘날 대개의 수성구민은 '수성구민운동장역'은 알아도 '수성구민운동장'이 어디에 있는 줄은 모른다. 그래도 수성구민운동장역이란 안내 방송을 듣다 보면 무슨 운동이든 연상을 하게끔 하는 순기능을 가진 역이 수성구민운동장역이다.
수성구민운동장역 화장실에는 '개미사진'과 '풀이글'이 있다. 수성구민운동장역뿐만이 아니라 대구지하철 1.2호선이나 3호선 화장실에는 박경대 님의《 글과 사진》이 붙어 있다. 여성화장실은 모르겠지만 남성 화장실 소변기 앞에는 많게는 서너 개에서 한 두 개는 꼭 걸려있다. 소변을 보는 사이, 이들 사진과 풀이글을 보는 순간 나는 데카르트가 되기도 하고 '로뎅의 생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광수는 눈은 로고스요, 귀는 파토스라고 했다.
소변기 앞 사진과 풀이글이 예사롭지 않다. 박경대의 《글과 사진》을 보는 순간 우습게도 나는 찰나적 '화장실 객인(客人)'이 된다.
붙어 있는 액자 사진에 개미 두 마리가 입을 맞대고 있다.
'인사만 잘해도 성공은 다가옵니다.'
두 마리 개미가 입을 맞댄 사진을 두고 풀이한 글이다. 명작, 명언일수록 쉽고 간결하다. 짧은 글과 사진이 길고 깊게 와닿는다.
나는 두 마리 개미를 보는 순간 '흥~잘 놀고 있네. 달콤하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는데, 박경대 님은 '인사만 잘해도 성공은 다가옵니다'라고 했다. 님은 눈이 지배하는 로고스적 사고형이라면 나는 눈보다 귀를 앞세우는 파토스적 인간이다. 평소 내 사고나 언행을 생각하면 딱 맞는 말이다.
언젠가 나는 대구 팔공산 가까운 봉무공원 둘레길에서 위의 사진처럼 개미 두 마리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개미나 사람이나 똑같았다. 둘이 입을 맞추며 애무를 하는 사이 불쑥 찾아든 한 마리 개미가 기어이 둘을 떼어 놓고 말았다. 개미도 사람도 남의 사랑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열차는 수성구민운동장역을 지나 수성시장역으로 굽돌아가지만 나는 화장실 소변기 앞 사진을 떨칠 수 없다.
"세상 일은 멀리 보세요."
오랑우탄이 맞다면 '그는 숲 속의 사나이'요, 고릴라라면 '추하고 흉포한 남자'리라. 어지간히 못 생긴 얼굴로 보면 고릴라가 맞는 것 같다. 고릴라인지 오랑우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소변을 보고 있는 내가 문제다. 멀리 보기는커녕 앞만 보고 분개하거나 포기 또는 미워한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조급증을 가진 사나이, 눈앞의 일들에 연연하는 사람, '추하고 훙포한 남자'라는 뜻의 학명을 지닌 고릴라보다 못한 내가 깨끗한 화장실에서 살짝 몸을 털고 있다.
"여기는 수성구민운동장역입니다."
This is Suseong-gu Community Stadium Station.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exist.
이렇듯 대구도심철도 화장실이 가끔 나를 허름한 '화장실 객인'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있다.
화장실《글과 사진》의 작가, 박경대 님에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박경대 님을 알지 못한다.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나머지 사진을 여백으로 올려보았다. 저작권 문제가 있다면 바로 삭제하겠다.(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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