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더웠던 여름, 늦더위가 길어지면서 올 가을 단풍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지만 입동을 지나 11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온 산, 온 동네가 단풍으로 물든 꽃길이다. 역시 자연은 말이 없지만 계절을 속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늘 사람이다. 사람이 문제다.
비슬산자연휴양림 입구도 붉게 물들었다. 예쁘다. 자연휴양림은 달성군 유가읍 일연선사길에 위치해 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풍부한 휴양 명소로서 산림청이 발표한 전국 100대 명산 가운데 하나다. 해발 1,058m의 조화봉을 중심으로 1,084m의 천왕봉, 989m의 관기봉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다. 봄철 참꽃, 여름 계곡, 가을 단풍과 억새, 겨울 얼음동산은 사계절 순환 장관을 이룬다.
올해도 숲길 따라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만든 묵을 지금도 먹고 있다. 지천으로 떨어져 있는 도토리는 다람쥐나 뭇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에게는 도토리묵이 되어 온몸을 바친다. 그렇다. 도토리는 온몸이 가루가 된 뒤에야 제 빛깔을 내면서 나름의 맛과 향기로 거듭난다. 도토리, 소재사 옆 국존 일연선사 앞에서 잠시 명상에 젖어 본다.
일연선사는 비슬산 대견사와 남평문씨 세거지에 있는 인흥사를 거쳐 군위 인각사를 중심으로 비슬산에서 37년간 주석을 하셨다고 한다. 주석을 하셨다는 말은 스님이 계신 주된 자리가 바로 비슬산이란 뜻이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와 비슬산은 그만큼 인연이 깊고 처음 주지스님으로서 발령받아 근무 한 곳 또한 비슬산 대견사라고 한다. 중생구제의 시발은 대견사지만 입적한 곳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일연선사 추모 다례제는 칠곡 군위 인각사에서 올리기도 하고 영천 은혜사에서 주관하기도 한다. 잠시의 명상을 뒤로하고 소재사를 비롯 한 바퀴 돌아보는 발길이 살짝 무겁다.
비슬산은 한자로 (琵瑟山)이라 한다. 비파 (비)에 거문고 (슬)을 두고 파자(破字) 해석이 흥미롭다. 임금 왕(王) 자가 넷이요, 반드시 필(必)에 견줄 비(比)로 파자 놀음을 하고 보니 임금 네 명에 버금가는 산으로서 네 명의 임금이 반드시 태어날 정도로 명산이란 뜻이라고들 한다. 대구 팔공산의 팔공(八公)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하니 피씩 웃음이 나온다. 혹자는 팔공산이 남성성을 지닌 웅장하고 벅찬 산이라면 비슬산은 비파와 거문고의 형상으로서 고운 여성을 닮은 단아하고 고운 산이라고도 한다. 산 전체가 단풍이 들어도 너무 곱게 들었다. 아름다운 명산, 그렇고 보니 비슬산이 수줍은 새색시의 붉게 부풀어 오른 볼이요, 요염기 넘치는 붉은 입술이다. 마음 같아서는 빨간 위스키 한잔과 함께 너스레를 떨고 싶다.
힘든 고갯길 다시 돌아 비슬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비슬산 전기차'를 타고 대견사를 둘러보며 '강우 레이더 관측소'를 찾았다.
가는 길목에서 '톱칼바위'를 만났다. 톱이나 칼의 모양을 한 바위들이 떼를 지어 형성된 기암괴석이다. 해설사의 안내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에서 8만 년 전에 지구상에는 마지막 빙하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빙하기 후대 주변에 위치해 있었고 이때 비슬산의 암괴류, 애추(Talus) 및 토르 (Tor)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무슨 전설이나 야담 또는 민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애추는 급경사 진 낭떠러지 밑이나 산기슭에 풍화 작용으로 암석 조각이 굴러 떨어져서 생긴 반원뿔 모양의 퇴적물이며 토르는 바위산을 의미한단다. 여하튼 기괴한 톱칼바위는 그저 나에게는 비슬산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다가왔다. 사찰입구 좌우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사찰 수호신 사천왕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강우 레이더 관측소'에 들어섰다. '전국 강우 레이더'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강우관측역사를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가 해발 1086M의 비슬산 정상인지 모를 정도로 실내가 아늑하고 포근하게 다가왔다. 강우관측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는 이렇게 형성되는가 보다. 고봉준령 험한 곳에 있다고 해서 다 힘든 것은 아니다. 전기차를 타고 오르내리며 비슬산 정산 아름다운 곳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수차례 다녀온 비슬산이지만 늦가을 단풍이 이렇게 곱게 물든 것은 처음 보았다. 대구는 분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다. 팔공산 거북바위에서 대구를 바라볼 때나 비슬산 정상에서 내려다볼 때나 대구는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룬 복 받은 도시란 생각이 든다. 천지 사방 육합이 모두 천기와 지기로 조화를 이루니 사계절 산수가 수려하고 풍화는 피해 간다. 물난리 불난리가 없는 천혜의 도시가 대구다.
문제는 사람이다. 앞집과 옆집, 텅 빈 빌라를 드나드는 외국인이 부쩍 눈에 띈다. 이러다가 머지않아 다민족국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슬산 단풍이 너무 아름답다."
"The fall foliage on Biseulsan Mountain is so beautiful."
"비슬山的枫叶非常漂"
Gunung Biseul sangat cantik. (구눙 비슬 상앗 찬틱)
언젠가부터 비슬산도 이렇게 물들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문제다.(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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