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마음에 동대구역을 찾았다가 경산과 구미를 오가는 광역전철을 타게 되었다. 2024년 12월 14일 대구 경북을 잇는 경산, 구미 간 전동차가 개통되었단다. 뜻하지 않게 횡재를 한 기분이었지만 동대구역 역사(驛舍) 구석 어디에도 개통을 축하하는 현수막이나 팻말 하나 없다. 구미행 열차를 묻는 승객의 질문에 답하는 역무원의 답도 퉁명스럽다. 그냥 귀찮다는 표정이다. 왜 이럴까. 하기야 시국이 시국인 만큼......
대구도시철도 1.2.3. 호선에 이어 경산, 구미 간 전동열차도 개통되고 1호선은 안심역에서 하양까지 연장되었다. 분명 축하할 일임에도 나는 이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12월 3일 비상계엄, 그리고 몇 시간 후 해제. 느닷없이 하늘의 빗장이 열리고 닫힌 날이 열흘이나 흘렀다. 세상은 온통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다. '서울 하늘 예수'는 어디로 갔을까. 파란 겨울 하늘, 나라가 춥고 어지럽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오언율시(五言律詩) 두보(杜甫)의 〈춘망(春望)〉이다.
나라는 깨졌어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때를 느꼈는지 꽃도 눈물을 뿌리고
이별이 서러운지 새도 놀란 듯 운다
봉홧불 석 달 동안 연이어지니
집안의 편지는 만금에 해당해
흰머리 긁어 머리카락 더욱 짧아지니
아예 비녀조차 이기지 못하는구나
세상천지가 파란 물결이다. 대구와 경북을 잇는 대경선 노선도도 파란색으로 더해졌다. 영상을 타고 흐르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도 파란 물결이다.
2500V 고압 전동차는 빼곡히 들어찬 승객을 태운 채 대구역을 지나 서대구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개통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탄 대경선이지만 설렘과 흥분이란 없다. 어지러운 시국에 조용히 개통된 대경노선, 분명 축하받을 일이지만 대구역, 왜관역, 사곡역, 어디에도 '축 개통'이란 현수막 하나 없기란 마찬가지다.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定州) 곽산(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김소월의 시 <길>이다.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고 있다. 나도 헤매고 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객실 두량에 몸을 의지한 열차가 구미역에 도착했다. 발 디딜 틈 없는 객실을 빠져나오는 승객들의 얼굴이 등살에 질린 듯 퍼렇다 못해 울긋불긋하다. 내 얼굴도 그렇다. 무슨 행사를 했는지 태극기 하나가 처박혀 있다. 그래도 나라 사랑,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된 태극 문양의 국기가 아닌가.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서울의 예수 1/정호승 시)
2024년 12월 24일. 대경선 개통과 함께 대통령 탄핵을 알리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금방이라도 눈비가 쏟아질 것 같다. 산 아래 호수를 돌아 다시 구미역으로 향한다. 구름 속 희미한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고 금오호수 파란 물결 위로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올겨울이 몹시도 추울 것만 같다. 겨울도 떨고 있다.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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