翩翩黃鳥 (편편 황조) 펄펄 나는 저 꾀꼬리
左雄相依 (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 (염아지독) 외로워라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이 노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4언 4구의 한시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사랑하던 짝을 잃은 고독감과 슬픔을 자연물인 꾀꼬리를 매개로 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제는 사랑하는 임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이다. 이 노래가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개인 서정시란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3년 10월에 왕비 송 씨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맞아들였다. 한 사람은 화희(禾姬)라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雉姬)라는 한(漢)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사랑 다툼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 머물게 했다. 그 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는 또 다툼을 벌였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집안의 천한 계집으로 어찌 이리 무례한가?"라고 하면서 꾸짖으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치희를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나뭇가지에 꾀꼬리들이 모여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것이 B.C.17년 (유리왕 3년)에 유리왕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황조가의 배경 설화다. 재미있다. 왕가의 여인이 서로 질투하여 하나가 하나를 쫓아버린 형국이다. 사랑은 삼각관계가 될 때 주로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두 여인을 곁에 두고 싶은 유리왕의 마음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것을 두고 신화적 영웅이 그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감정에 충실한 연민과 외로움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화희(벼)로 대표되는 농경족과 치희(꿩)를 앞세운 수렵족의 분쟁을 중재하지 못한 왕의 탄식을 노래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서정과 서사, 개인가요와 집단가요가 분화되지 못한 고대시기 가요의 특성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황조가의 작가인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아버지 동명 성왕을 찾아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태자에 봉해졌다. 동명왕에 이어 즉위한 후 고구려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다. 아버지 동명왕은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신화에 의하면 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의 몸에서 닷되 크기의 알에서 탄생한 고구려의 제1대 왕이 된 인물이다. 땅을 지배하는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의 결합, 천과 지가 하나되어 탄생한 동명왕. 그의 아들이 유리왕. 이런 고귀한 혈통의 유리왕이 황조가의 작가란 점을 고려한다면 유리왕도 현실적 고난을 겪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고전문학에 나오는 신화들과 황조가 등의 고대가요를 즐기다 보면 끝없는 상상력이 재미를 더한다. 이것 또한 고전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이리라.
요즘 나는 구인환(서울대 명예교수/신원문화사)의 《우리 고전 다시 읽기》와 고교 문학교재를 머리맡에 두고 목요일 밤마다 미스트롯에 빠져 있다. 고전 읽기도 흥미롭고 조선티비의 '미스트트롯'도 재미있다. 특히 트롯은 미치도록 재미있다. 단순히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병든 내 몸과 마음을 시나브로 사랑하게 한다. 코로나가 절정이었을 때 '미스트트롯'은 하나의 치료제였고, 해를 걸러 다시 시작된 '미스트트롯 2'는 이어진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진정제였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미스트트롯 3'은 만병통치약이 된 듯하다.
트롯은 단순한 대중가요가 아니라 종합예술로서 나를 마구 흔들어 놓는다. 그저 내 마음을 쥐었다 폈다 마음대로 요리한다.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아픔이 있는 노래들이 사람을 울리고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트롯이 고전이고 고전이 트롯이다. 동명왕이 알에서 깨어나고 유리왕이 꾀꼬리를 쫓고 있다. 고전이 전지적 시점이라면 트롯 또한 전지적 시점으로 내 마음을 울리고 웃긴다. 지난날 가벼운 대중가요로 인식되었던 뽕짝이 이렇듯 격 높은 종합예술인 줄은 몰랐다. 티비 조선의 트롯 세계. 이미 조선 티비는 트롯 세계화의 산실이 되어 버렸다.
고대가요와 미스트트롯, 꾀꼬리 한 마리가 '팀 미션'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고전시가와 트롯이 있는 한 내 삶은 외로움이나 우울로부터는 자유로울 것 같다. 편편황조(翩翩黃鳥), 염아지독(念我之獨)이여, 안녕이어라. (202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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