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책 읽기 & 감상

[일상&산문: 김억, 주요한, 황석우를 생각하다]

백두산백송 2025. 2. 2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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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다. 담벼락 아래서도 거실바닥에서도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한 줄 시가 당긴다. 이리저리 시집들을 훑다가 김억(金億)의 '봄'과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란 시를 오랜만에 본다. 두 사람은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통하여 프랑스의 상징시를 번역 소개하면서 활동한 시인들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시인인 황석우(黃錫禹)와 더불어 이들은 근대시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며 우리 시단의 성격과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흐름으로 볼 때 자유시의 형성기는 1910년에서 1919년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894년 갑오개혁,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 상실, 이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10년간의 시기를 우리는 '근대문학의 태동기'라 부른다. 이처럼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문학의 시작은 1910년대 일제 치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문학비평가 백철과 조연현 등은 이 시기를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중심인 '이인 문단 시대'라 일컫기도 했다.

육당의 최초의 개인 시조집인 '백팔번뇌'가 나오고 1917년 이광수의 최초의 근대장편소설 '무정'이 출간되면서 운문과 산문의 두 축을 중심으로 근대 문학은 꿈틀거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문학은 육당(六堂)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서 보듯 아직 계몽적 이상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문학의 고유한 미의식은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체시의 문제점을 극복해 준 시인들이 1910년대에 등장한 김억, 주요한, 황석우이다.

입춘 지나 봄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지만 봄은 이미 거실바닥에서 노닐고 있다. 봄은 먼 산 아지랑이에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겨울 거실바닥에서부터 온다. 서서히 이불을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 볼 일이다.

1918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 발표했던 김억의  '봄은 간다'란 자유시를 보자.

밤이도다
봄이다.

반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비낀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임은 탄식한다. (김억, '봄은 간다'1918.1)

'검은 내가 떠돌고 종소리는 비켜가고,  꽃은 떨어지고 임은 탄식한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봄날의 애상감에 젖어 있다.

또한 주요한은 1919년 '샘물이 혼자서'와 '불놀이'를 발표하면서 우리 시단에 본격적인 자유시의 길을 열었다. 흔히 우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를 말하라면 주요한의 불놀이를 꼽는다. 아마도 이 시기에 같이 활동한 김억과 황석우보다 주요한의 활동이 좀 더 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황석우도 이 시기에 '봄'이란 시를 '태서문예신보(1918)에 발표했다. 어쨌든 1910년대는 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자유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19년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創造)'가 나오면서 본격적인 자유시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한국근현대문학사/장부일, 조남철, 이상진 공저/현대시의 이해와 감상/김태형, 정희성 엮음 참조)

아직도 정월대보름 내린 춘설이 담벼락 밑에 얼어붙어 있지만 새해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설렐 수밖에 없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 이리요.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 이리요.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불놀이, 주요한, '창조' 창간호 1919.2.) 임을 잃은 슬픔과 그 극복의지를 노래한 주요한의 불놀이 마지막 연이다.

두 시인의 시를 보면 봄날 애상에 젖어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좌절, 그리고 이에 따른 새로운 희망과 극복의지를 엿볼 수 있다. 비록 일제치하지만  프랑스 상징주의 시들을 소개하며 자유시의 첫 깃발을 꽂은 두 시인, 김억은 한국 서정시의 으뜸 시인 김소월을 제자로 두었고 주요한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라 불리는 '불놀이'를 남겼다.

오는 봄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 자유시를 하나하나씩 소환해 본다. 거실바닥에 먼산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이른 봄날 아침이다.(202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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