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책 읽기 & 감상

[일상&산문: 산울림 영감, 법정을 생각하다]

백두산백송 2025. 3. 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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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산문집을 읽고 있다. 왜 스님은 홀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임에도 굳이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제목을 표제로 삼았을까.
향년 77세로 10여 년 전 입적하신 그의 글을 오늘의 '수필산책'으로 삼아 본다.

홀로 사는 즐거움/법정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고 살 만큼 살다가 떠날 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독신 수행자는 주어진 여건 자체가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 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거나 얽혀 들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 있지 않는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속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만났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와 같은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차피 저마다 자기식대로 사는 게 인생이다.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 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인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도 일찍이 말했다.
'홀로' 사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지 혼자 지낸다고 해서 과연 '홀로 있음'인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즉, 개체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섬도 뿌리는 대지에 이어져 있듯.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론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다코타족 인디언 오히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는 홀로 있을 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는 즐거움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살아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누가 홀로 가는가?'
'태양, 태양이 홀로 간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베다 경전에 나오는 문답이다.
내가 소싯적부터 즐겨 외는 청마선생의 <심산深山>이란 시가 있다.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자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
진정한 자아, 즉 진아는 언제 드러나는가. 결국 혼자로서 완전체가 될 때 가능하다.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고독은 진정한 자기와의 관계를 뚜렷이 형성할 수 있지만 고립은 출구가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다.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섬도 뿌리는 대지에 이어져 있듯.'

동네 미용실에서 펌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출입문 앞에서 미용실 안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인 미용사님은 머리 손질을 멈추고 사료를 들고나간다. 들고양이이지만 미용실 출입문 옆에 고양이집을 마련해 두고 10년째 돌보고 있단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세 마리를 챙기고 있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미용실 3층 주거용 안방에서 집고양이 한 마리와 역시 10년이 넘도록 숙식을 같이 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남편과 딸보다 더 가까이하고 있는 셈이다. 남편과는 벌써부터 각방을 쓰고 시집가기를 거부한 과년한 딸은 자신의 방을 사무실 겸용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고 가족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네에서는 소문난 잉꼬부부요, 서비스 좋고 여유로운 미용실 원장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는 그녀에게서 법정의 '홀로사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가족과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 등 일체의 관계망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또 다른 기쁨과 보람은 자신과 동일시되고 있는 고양이들에게 있다. 머리를 만지면서도 눈은 출입문 앞 고양이에게 가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후다닥 머리를 손질하고 또 고양이 간식을 들고나간다. 내가 보기에도 고양이들과 그녀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3층에 있는 집고양이와는 함께 이불을 덮고 잔 세월이 10년이란다. 딸과 남편과 이불을 같이 덮고 산 세월보다 더 길단다. 이쯤 되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것은 아니다. 고양들 속에 자신이 있고 남편이 있고 딸애가 있다. 그녀를 둘러싼 일체의 관계망이 하나로 완전체를 이루고 있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산사 법정스님은 어찌 함께 살아보지 않고도 '홀로 사는 즐거움'을 깨달았을까. 자연과의 합일, 부분이 아닌 전체로써 '태양은 홀로 간다'는 베다 경전의 문답을 화두로 청마선생의 심산(深山)이란 시를 독송했던 법정스님을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는 '산울림 영감'되어 '큰 울림' 남기며 그렇게 호젓이 즐기다 입적하셨으리라.

엄마를 찾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그녀를 또 불러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소유로 일관된 삶과 큰 울림을 던지고 가신 선승의 '홀로사는 즐거움'이란 산문집 하나가 엄마를 찾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범벅되고 있다. '산울림 영감'의 '큰 울림'을 화두로 오늘 하루 묵상에 잠겨본다.(20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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