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의 시, 《팔복(八福)- 마태복음 5장 3 ~12 절》(동주와 빈센트,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스페셜 에서)
무릇 복을 받고자 한다면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슬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 것 같다.
잠 없는
밤에는
시를 쓴다
시에 박힌
상처가
꽃처럼 피어난다
곧 불어올
바람
모진
바람이
또
상처를
남기고 간다
슬퍼할 줄 모르는 나는 바람만 불면 마음에 구멍이 생긴다. 어제도 심한 바람이 가슴을 치고 갔다. 하늘 높은 꼭대기에는 바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바람기둥이 나를 마구 때리고 사라졌다.
좀 더 현명하지 못하고
좀 더 희생적이지 못하고
좀 더 봉사적이지 못하고
좀 더 정직하지 못하고
원래 그와 나는 거리가 있었다. '자유의지'를 수도 없이 외쳤던 그는 자유롭게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유를 꿈꾸고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 제한된 것만을 하도록 허락된 자유. 자유정신이 어떻게 이런 허구적인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자유정신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지성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사람, 다시 말해 주어진 사회를 가장 답답한 구속으로 느꼈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니체라는 사람을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벽한 것, 자기 충족적이란 것, 그리고 불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없다.'(후회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발췌/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사계절 출판)
생각과 존재의 불일치, '결코 죽을 수 없는 거짓된 죽음', '윈초적 욕망', 심한 바람이 가슴을 치고 간 날, 나는 담벼락에 머리를 박고 '십자가'를 보고 있었다. (20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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