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따라 마음 따라]: 자작수필 & 자작시

[명상수필: 거듭나고 싶다]

백두산백송 2023. 12. 2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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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 거듭나고 싶다]

"글을 쓰면 부활한다." 글을 대하는 그의 문심(文心)이 주는 성스러운 이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심이란 말은 글을 쓰는 이의 마음이요 철학이다. 문심을 통한 문학적 부활을 꿈꾸는 그를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부활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종교적 믿음을 떠나 늘 정신적, 육체적으로 거듭나기를 꿈꾸는 그 무엇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른다. 실제 그는 치열한 신앙생활을 통해 종교적 부활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부활을 부정하고 돌아서며 문학인의 삶을 선택했다. 신앙을 포기하고 돌아선 그에게 문심의 불을 지핀 사람은 고교 때의 은사라고 했다. 그의 이력으로 보나 사람 됨됨이로 보나 모자란 구석이 없는 그를 두고 "글을 쓰면 부활한다"는 말을 불쑥 던진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글을 쓰면 부활한다"는 말이 어디 예사로운 말인가. 그렇다. 사람이 글을 쓰고 글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한 편의 글 속에는 내가 있고 내 아닌 나도  있다. 글은 때로 죽었던 나를 되살아나게 하고 의미 없던 나를 의미 있는 나로 거듭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글이 주는 매력이요 힘이라면 이 또한 글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억년 비정의 함묵에/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

왜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청마 유치환의 바위란 시가 떠오를까. '억년 비정의 함묵', 문심을 통한 부활에 무슨 말이 필요한가.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끝내 문학을 통한 부활의 길로 다가설 수 있다면......

그래 "글을 쓰면 부활한다." 그럴 수 있겠다. 쓰고 버리고, 버리고 쓰고, 닦고 또 닦으면 신심이 문심이 되고 문심이 신심이 되어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고 보니 죽을 만큼 괴롭거나 부끄러웠을 때도 글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신앙고백이 문학부활로 이어지는 그와 같은 무슨 결연한 의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글 속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글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글이 있으니 내 삶을 지탱하는 것이 글이라면 글이다.

이태수 시인의 '탁마'란 시도 떠오른다. 탁마(琢磨)의 일절이다. /지웠던 마음 되살아나고/또다시 바뀌는 마음이/그 위에 포개진다//몇 번이나 지웠다가 살리고/고쳐서 다시 또 들여다본다//쳇바퀴 돌리는 다람쥐같이/같은 궤도만 맴돌았던 말들//그나마 둥글어지긴 했는지/깎인 모서리를 들여다본다//

썼다가 지운 말들이 어디 한둘 이리요. 수십 번 탁마 한 말들을 끝내 품지 못하고 던져야 하는 아픔. 내 삶도 우리네 삶도 그렇다. 그나마 둥글게 다듬은 마음도 마음줄 잠시 놓고 한눈팔다 보면 다듬은 말들의 모서리가 가슴을 콕 찌른다. 글로써 다듬은 말들, 말이 사람이고 사람의 말로써 부활은 오지 않았던가.

부활, 오늘도 나는 열십자를 그리고 있다. 성호(聖號) 속에는 늘 내가 있고 글이 있다. 신앙고백이 끝내 문학부활로 우뚝 선 그의 문심을 바라보며 다시금 성호(聖號)를 그려본다. 사람이 보이니 글이 보이고, 글이 보이니 사람이 보이는 것 같다. 그래 나도 글로써 내 아닌 나로 거듭나고 싶다.

"글을 쓰면 부활한다."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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