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상수필: 부활의 칼]
부활의 밤은 또 지나갔다. 세례를 받던 마음으로 새 삶에 대한 서약을 했다. "~~ 믿습니까?" "~~ 믿습니다." 성수가 머리에 꽂혔다. 하느님의 물로 몸과 마음을 닦는 일에 헌사한다. 천국이 고요히 내려와 말씀의 하느님을 빛으로 맞아들인다. 하늘이 있고 천사가 있는 밤, 빛으로의 하느님이 부활의 길을 걷고 있다. 나도 따라 걷고 있다.
뜻깊은 날에 정호승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당신의 칼》이란 시를 읽다가 전부나 일부를 인용하려다가 저작권 시비 때문에 접었다. 마음이 아프다.
'일부나 전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창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문구를 보고 포기했다. 작은 글씨의 '반드시'란 말이 비수처럼 다가왔다. 좋은 시에도 숨겨진 칼이 있으니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도 '당신의 칼', 첫 구절 하나는 훔쳐와야 할 것 같다.
'산다는 것은 결국/ 평생 가슴속에 간직한 칼 한자루 버리는 일이라고/당신은 바위 위에 칼을 꺼내놓고도/버리지 못하고'//(출전: 정호승 시집: 당신을 찾아서, 창비)
칼에 대한 트라우마가 많은 나는 칼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칼을 맞아도 너무 많이 맞았다. 칼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들 딸 낳아 나라를 구했는데도?', 하늘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늘 높은 십자가가 속죄라면 차라리 십자가 높은 하늘에 내 목을 달았을 것을.
나에게는 가슴속에 품고 있는 칼이 너무 많다. 미움의 칼, 사랑의 칼, 시기의 칼, 질투의 칼......
이 모든 칼들을 버려야 하는데 아직 버리질 못하고 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칼 저 칼을 들고 사람을 치고, 나무를 치고, 바람을 치고, 가슴을 치고 심지어는 낡고 허름한 내 속옷을 내리치기도 한다.
나는 내가 들고 내리치는 칼이 그리 두렵지 않지만 혹여라도 당신이 당신의 칼로 나를 내리친다면 나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지금껏 내가 내 칼을 들고 망나니 춤을 추었을지언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의 칼이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칼로 내 가슴을 친다면 나는 피할 방도도 힘도 없다. 나는 죽어야 한다.
부활의 밤이 지났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현관 앞 모란은 행여 꽃비에 몸을 상할까 봐 한껏 움츠리고 있다. 부활을 상징하는 계란 두 개가 예쁜 포장지 속에서 부활을 꿈꾸고 있다. 푹 익은 계란, 생명력이 없는 계란이 부활을 꿈꾸고 있다. "먹어야 계란이 부활하고 내가 부활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습니다."
부활을 꿈꾸는 맹종의 밤을 위해 나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라면 꿇었고 촛불을 밝히라면 밝혔다. 그런데 여전히 하늘은 멀어 보이고 십자가는 하늘에서 나를 저울질하고 있다. 《부활 이후》란 시도 정호승의 시다. '부활 이후에도 부활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동의한다. 어쩌면 부활 이후 더 부활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 부활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당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기 위해서는/ 부활 이후에도 부활의 새벽이/찾아와야 한다.'//(출전: 정호승 시집: 당신을 찾아서, 창비)
이 시를 읽고서야 나는 하늘에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끝없이 칼춤을 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활은 자만과 만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부활은 사랑이요 생명이다.
부활의 칼, 좋은 시에 비수가 있듯 부활에도 칼이 있다. 만일에 당신의 칼로 나를 치고자 한다면 뒤돌아 보지 말고 바로 쳐라. 아직 스스로의 십자가를 청하기에는 하늘이 너무 높고 멀리 있다.(20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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