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안윤하 시집 《니, 누고?》 리뷰, 마음이 아프면 시도 아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놓고 유리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오후 네 시의 동대구역 대합실, 형형색색의 군상들이 오고 간다.
안윤하 시집 《니, 누고?》를 들고 나왔다. "니, 누고?" 그래, 틈 날 때마다 물어보지만 내가 나를 모른다. 내 안의 나를 내가 모르는 것도 그렇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지경이면, 세상은 끝났다. "이게 누구지?" 알 듯 말 듯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나르시스. 유리창에 비친 내가 웃고 거울 속 할머니가 웃는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시집이 던진 화두, '니, 누고?'
무표정한 모습, 혼자 때론 둘셋, 여전히 대합실은 분주하다. 오후 네 시 사십 분 ktx가 코앞에 다가왔다. 커피숍 유리창이 차창으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변해 버린 나르시스가 웃음을 날렸다. 대합실이 객실이고 객실이 대합실이다. 말없는 질주, Ktx 시속 300킬로의 폭력이 쾌락을 동반한다. 시집을 펼쳤다.
<지워진 거울> 안 윤 하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니, 누고?" 하던
요양원의 할머니
가끔은
자신을 알아볼 수 없고
거울이란 것도 몰랐으면 좋겠다던
그 할머니
개울에 비친 얼굴에
마음을 빼앗긴다
지독한 나르시스다
몇 마리 버들치가
주름살도, 흰머리도
지우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소녀적 얼굴만
어리연꽃으로 남아
물살에 흔들리고 있다』
길게 드러누운 병상이 거울이 아니고 개울이다. 버들치 몇 마리가 주름살과 흰머리를 지우고 달아났단다. 예쁘고 착한 어리연꽃 나르시스, 요양원 할머니가 또 웃고 있다. 무섭다. 미친 듯이 달려온 서울역 대합실, 벽걸이시계는 십팔 시 사십 오분을 껌뻑이고 있다. 목이 탄다. <지워진 거울> , 마음이 아프면 시도 아프다.
"니, 누고?"를 외치던 할머니가 기어이 가셨나 보다. 이어지는 그녀의 시 <자살 혹은 자연사>가 한 편의 서사로 다가온다.
<자살 혹은 자연사>/안윤하
『기관지암 판정받은 엄마는 기침하면서도 약을 거부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식물인간처럼 꼼짝하지 못하는데 쩍쩍 갈라지는 입술에 숟가락으로 물을 한 방울씩 떠 넣었다. "엄마! 물이라도 조금씩 넘겨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 간곡하게 말하며 하루가 지나고 자식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또 하루가 가고 아미타경을 외며 부산을 떨었다. 혼수상태인 엄마는 불편한 표정으로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바지를 내리니 냄새가 올라왔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 신호를 보내려 했나 보다.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 숟가락으로 물을 입에 넣으려 하자 꿈쩍 앉던 손으로 숟가락을 쳐서 방구석까지 날려보냈다.
그 후
이틀 동안 물 한 방울도 넘기지 않더니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고 보니 어머니도 '자살 혹은 자연사'로 돌아가셨나 보다. 방구석 한편에서 무슨 말을 남기고 가셨는지 알 수 없었던 어머니. 한식, 청명을 지난 무덤가에 한줌 흙이 눈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니, 누고?". 마음이 아프면 시도 아프다. (202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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