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감상: 울프의 독서기법과 이어령의 명문장, 멍 때리기]
교보문고에 앉아 멍 때리고 있다. 멍 때리기는 공원이나 강둑이면 족하지만 굳이 문고까지 와서 멍 때리기를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싶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책들이 사고뭉치다. 온갖 말들이 치고받고 야단이다. 책은 말이 없는데 사람들은 책을 폈다 덮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책과의 전쟁이 독서라고 착각할 정도다.
문고에 앉아 있지만 몸도 마음도 마구 무너져 내린다. 그냥 무너져 흘러간다. 글도 마음도 다 흘러간다. 이유는 독서도 글쓰기도 싫어진다는 것이다. 싫어진다기보다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몸과 마음이 늘어지고 눈이 아픈 것을 어이하랴. 즐거워서 하는 일이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멍들게 한다면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조만간 결단이 날 것 같다.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란" 울프의 산문을 읽다가 또 글은 어떻게 써야 하나? "이어령의 "<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를 뒤적이고 있다.
독서에 일정한 규칙이나 관습이 따로 없듯 글을 쓰는 데도 일정한 규칙과 방법이란 사실 없다. 그냥 자기 방식대로 읽고 쓰면 된다. 하지만 독서도 글쓰기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엉망이란 것이 문제다. 이것을 알면서도 그냥 덮어 둔다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요, 자기기만이다.
누군가로부터 책은 이렇게 읽어야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은 책에 대한 모독이요, 독서자의 자유정신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울프는 말한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 독서도 책을 읽는 이의 나름의 규칙과 관습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은 대부분 남녀노소와 당나귀의 삶에서 스쳐가는 그런 순간들의 기록일 뿐이에요.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 어떤 문학이든 쓰레기 더미가 쌓입니다. 이미 사멸한 빈약하고 더듬대는 억양으로 기록된, 사라진 순간과 망각된 삶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쓰레기를 읽는 기쁨에 몸을 맡기다 보면 분명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정말이지 그렇게 버려져 썩어가는 인간 삶의 유물에 압도될 거예요. 그냥 편지 한 장 일 수도 있지만 그걸 읽고 문득 눈을 뜰 수도 있어요. 그저 몇 개의 문장일 수도 있지만 그로부터 드넓은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고요.
독자는 감정을 통해 배워요. 우리 각자의 독특성을 너무 억누르면 그것이 결국 빈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시간을 들여 우리의 취향을 훈련할 수는 있지요. 얼마간은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시, 소설, 역사, 전기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게글스럽게 집어넣은 후 한동안 독서를 멈추고 살아 움직이는 세상의 다양함과 모순을 바라보면 그것이 약간씩 달라지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울프의 산문,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에서)
그래, 욕심내지 말고 틈나는 대로 이렇듯 읽고 쓰자. 비롯 내일 당장 멈출 일일지라도 오늘은 이렇게 멍 때리며 가자.
글도 마음도 자꾸 멀어져 간다. 백내장이 깊어진다고 하니 글맛이 없다. 이어령의 <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 李 御 寧 > 글을 보며 멍 때리기를 거듭해 본다.
◇명문은 두통(頭痛)을 낫게 한다
曹操(조조)는 두통이 날 때마다 陳淋(진림)의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袁紹 (원소)의 편에서 자신을 비방해 오던 陳淋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도 벌하지 않고 문서계로 등용시켰다. 중국에서는 그래서 名文을 쓰는 일을 傾國之大業(경국지대업)이라고까지 했다.
「달이 밝다」와 「달은 밝다」의 차이
名文을 쓰려면 우선 「달이 밝다」와 「달은 밝다」의 그 차이부터 알아야 한다. 「이」와 「은」의 조사 하나가 다른데도 글의 기능과 그 맛은 달라진다. 「달이 밝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달이 환히 떠오른 것을 나타내는 描寫文(묘사문)이다. 그러나 「달은 밝다」는 달의 속성이 밝은 것임을 풀이하고 정의하고 있는 설명문이다.
이태백의 詩에 「내 어릴 적 달이라는 말을 몰라 이름 지어 부르기를 『백옥의 쟁반』이라고 했느니」라고 노래한 것이 있다. 묘사문은 마치 달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달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쓰는 글이다. 습관이나 고정관념의 굳은살을 빼면 늘 보던 사물들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기」
이것이 묘사文의 효과이며 그 특성이다. 그리고 그 글들은 항상 「지금」 「여기」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個體(개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설명문은 정반대로 「낯선 것」을 「낯익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글이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고쳐 주고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옮겨놓는 사전의 낱말 풀이 같은 글이다. 「지금」 「여기」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떠오르는 달이 아니라 백과사전의 圖解(도해) 속에서 運行(운행)되고 있는 세계의 달, 무한 속의 달이다.
그러니까 기행문은 묘사문이요 여행 안내서는 설명문이다. 어느 때 묘사문을 쓰고 어느 때 설명문을 써야 하는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글쓰기의 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文體는 주제이다
뷰퐁의 유명한 정의 「문체는 인간이다」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같은 인격체라도 편지글을 쓸 때와 일기를 쓸 때 그리고 수필을 쓸 때와 소설을 쓸 때의 그 文體(문체)는 달라진다. 사람에 의해서 文體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따라서 文體는 변화한다.
文體는 외출할 때 옷을 입는 것과 같다. 일하려고 나가는 것인지, 파티장에 가는 것인지, 혹은 가는 데가 장례식장인가 결혼식장인가에 따라 옷의 선택이 전연 달라진다. 文體는 사람이 아니라 주제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문장의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릴 때 비로소 그 특성을 나타낸다. 형식에 치우친 글은 불꽃과 같은 것이고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수풀과 같은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며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것이 될 때 진정한 文體는 획득된다.
◇병렬법을 활용하라.
「달처럼 보이다가 별처럼 보이다가 나비처럼 보이다가 티끌처럼 보이다가 염치고개를 넘어간다」
춘향이가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을 읊은 판소리의 한 대목이다. 멀어져 갈수록 점점 작게 보이다가 고개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이도령의 모습이 불과 네 개의 단어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달이 별처럼 작아진 다음에 어째서 별보다 큰 나비가 등장하는가. 선형적인 글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대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달은 별과 짝이 되어 이도령의 얼굴 모양을 나타내고 나비는 티끌과 대비하여 이도령의 걸어가는 동작을 나타낸 竝列(병렬) 구조로 파악하면 그 절묘한 표현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달과 별은 靜態的(정태적)인 것이고 나비와 티끌은 날아다니는 것으로 動態的(동태적)인 것이다. 크고 작고 정태적이고 동태적인 네 단어의 병렬적 구조에 의해서 멀어져 가는 이도령의 모습과 작아져 갈수록 커져가는 춘향이의 別離(별리)의 정감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직물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詩든 散文이든 名文의 조건은 지엽적인 비유나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역시 그러한 병렬법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기량이 있는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못 하나 박지 않고 집 한 채를 짓는다. 억지로 못질을 하여 나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귀를 맞추어 균형과 조화로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와 같은 접속사의 못으로 글을 이어간다. 그런 글을 읽다 보면 못을 박는 망치 소리처럼 귀에 거슬리게 된다. 잘 다듬어진 글의 이미지와 리듬은 인위적으로 접속사를 붙이지 않아도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글의 앞머리만이 아니다. 글을 맺는 종결형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것이다」로 끝맺는 일이 많다. 한 글에 「것이다」를 몇 번 썼는가.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얼마나 많이 썼는가 기계적인 통계만으로도 惡文과 名文을 구별해 낼 수가 있다.
I LIKE IKE
가장 짧은 名文의 본보기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 표어인 「아이 라이크 아이크」일 것이다. 더 이상 짧을 수 없고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구조이다. 세 단어로 된 문장이지만 글자 종류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like의 알파벳 넉 자 속에 l like ike의 모든 글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네 글자만 가지고 한 문장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 짧은 글 속에 頭韻(두운:initial rhyme) 胸韻(흉운:internal rhyme) 그리고 末韻(말운:end rhyme)의 다양하고 절묘한 운율이 모두 들어 있다. 「아이」의 두운은 「아이크」의 「아이」와 짝을 이루고 동시에 「라이크」의 흉운과 겹쳐진다. 「라이크」는 또 「아이크」의 말운과 맞물려 있다. 소리와 의미가 마치 메아리처럼 얽히면서 짧은 문장 속에 변화와 반복, 차이성과 동일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누구나 이 표어를 한번 들으면 평생 동안 잊히지 않게 된다. 名文 이란 외우려고 해서 외워지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머릿속에 가슴속에 刻印(각인)된다. 희랍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말을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다. 이 표어를 가슴속에 달고 다닌 아이젠하워의 선거원들이나 유권자들은 진실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구양수(歐陽修)의 베개
옛날 문장가들은 名文을 쓰기 위해서 구양수 베개를 베었다. 구양수 베개란 울퉁불퉁한 옹이가 많이 박힌 木枕(목침)을 뜻한다. 그것을 베면 편안치가 않아서 잠에 깊이 빠지질 않는다. 그 어렴풋한 선잠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그 한가운데서 보통 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문장들이 떠오른다. 구양수의 名文들은 실제로 비몽사몽 간에 써진 것들이라고 한다. 구양수 베개는 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그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남들이 높은 베개를 베고 편안한 잠에 취해 있을 때 눈 떠 있는 자. 그 불면의 밤 속에서 名文은 알을 까고 나온다.
인터넷으로 지금 글쓰기가 다시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메일, 채팅, 그리고 게시판과 자료실에 글을 써서 올리는 기회가 날로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의 소중함과 그 힘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조조(曹操)가 아니라도 名文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누구나 조조가 되고 누구나 진림(陳淋)이 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 그것이 인터넷 시대의 진정한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님은 갔지만 님의 글은 시공을 초월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고 있다. 명문장을 원한다면 꾹 참고 읽어 볼 일이다. (20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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