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따라 마음 따라]: 책 읽기 & 감상

[산문&감상: 수필,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장르다]

백두산백송 2024. 6. 12.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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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감상: 수필,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장르다]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 <수필의 쇠퇴, 1905 作>을 읽다 보면 수필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싹 사라진다. 수필을 철저히 개인적 영역의 글로 치부하며 아예 수필이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울프는 수필을 수필이라 하지 않고 사사로운 수필이라고 칭한다.

-사사로운 수필이 몽테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사실인데 이럴 경우 몽테뉴를 초기 현대인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 사사로운 수필은 그 시대 이래로 상당히 흔하게 쓰였지만, 우리 시대에 그것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는 워낙 엄청나고 특이해서 그 형식을 우리 시대의 형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먼 후손들이 보았을 때 우리에게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시대의 기호로 말이다. 우리가 수필에서 딱히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찰스램의 수필집 <엘리아의 수필>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 수필이 그 어떤 형식과도 비교가 안 될 자연적인 말하기 방식인 양 우리가 아주 수월하게 쓰기 때문이다.

아주 넓게 정의했을 때 수필이라는 형식에는 소중히 담아둘 만한 온갖 다양한 생각들을 담은 글이 모두 포괄된다. 하지만 수필이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고 정의했을 때에도 그 때문에 제외되는 수필은 많지 않아서 여전히 엄청난 수가 포함 될 것이다. 수필이란 거의 '나'-,'내 생각에'-로 시작하고, 일단 이렇게 시작하면 역사도 아니고 철학이나 전기도 아닌 수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아주 뛰어나고 심오한 글일 수도 있고, 영혼의 불멸성을 다룰 수도 있고 왼쪽 어깨의 관절염 얘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견해의 표현인 것이다.-

이렇듯 울프는 수필을 개인적인 사사로운 글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현재 진행형인 실험수필이나 아포리즘 수필 등을 이야기할 때는 울프의 논리도 조금은 주춤해지리라 본다.

울프는 여기에다 당시 수필이라는 형식의 글이 유행한  것은  '글쓰기의 기술 덕'이라고 보았다.  '글쓰기의 기술 덕'에 수필가가 생겼고 수필가는 단지 글쓰기 재능이 생겼기에 글을 쓴다고 했다. 이 말은 글쓰기의 재능의 결과물이 수필이란 것이다. 기가 찬다. 철학도 역사도 문학도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사로운 글, 결국 수필은 "글쓰기의 기술 덕"이 빚어낸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글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칭 수필가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기가 차는 것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글을 보면 아예 수필 쓰기를 포기하고 싶을 지경이다. 어디 한번 보라.

-수필의 대중화는 그것이 개인의 독특함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형식이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인쇄물이라는 점잖은 외양을 쓰고 자기 중심주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출간된 글을 관심을 갖고 읽기 위해 굳이 음악이나 예술이나 문학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현대 비평의 대부분은 그저 그러한 개인적인 호불호- 차를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일-를 수필이란 형식으로 담아낸 것일 뿐이다. 꼭 글을 써야겠다면 예술과 문학이라는 신비로운 영역은 제발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 모두 읽을 수 있는 책이나 누구나 볼 수 있게 걸린 그림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만의 단서를 가진 단 하나의 책이나 단 한 사람의 시선,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면 차라리 그 자체로는 영원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접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수필이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의 글도 문학적 순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말한다. 이 자기중심적인 글에도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나름의 의미란 다름 아닌 일상 속 "무의미한 자아"가 "의미 있는 자아"로 거듭나는  "자아회귀의 속성"을 지닌 것이 수필이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된 수필이 때론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역사적인 의미의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 수필이 지닌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이런 수필에 대해 울프는 또 가슴을 때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아주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런 위협이 실제 성취되는 일은 드물다. 수많은 자서전 가운데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은 한두 편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라는 끔찍한 유령을 마주하면 정말 담대한 사람도 눈을 가리거나 도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는 것은 다들 마땅히 기대하는 진솔한 진실이 아니라 수필의 형식을 빌려 소심하게 곁눈질하는 글일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진정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결여하고 있다.-

1905년, 그녀의 나이 23세에 쓴 <수필의 쇠퇴>란 글을 나는 이토록 뼈저리게 읽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아파도 많이 아프다. 하지만 1882년 영국에서 태어나 인간 삶에 대한 비범한 시선을 담은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 > 등으로 20세기 영미 문학의 기틀을 세운 작가로서 <자기만의 방>이라는 기념비적 산문집을 남긴 울프의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수필을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울프의 <수필의 쇠퇴>란 글은 충격이요 동시에 큰 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울프는 분명히 말했다. "수필이란 독특한 형식에서 그 독특한 내용이 나온다. 다른 형식으로는 딱 맞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이 형식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여기에다 "수필 형식이 자기 사상의 정수를 구현하기 때문에 진정한 영감의 힘으로 이 형식을 사용하는 뛰어난 인물들도 존재한다."라고.

그렇다. 어쩌면 인간성 상실의 시대, 모든 것이 인공지능으로 집약되는 이 시대에 그래도 자기애를 바탕으로 자기중심적인 수필이 만개하다면 김난도가 말하는 '휴먼터치'의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장르가 수필인지도 모른다. 나는 희망한다. 1905년 울프가 말한 '수필의 쇠퇴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애를 바탕으로 자기중심적인 수필이 우리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문학 장르'로 부활하기를...... 수필, 그래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장르다.  (202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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