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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수필: 도토리묵을 생각하다 ]

[명상수필: 도토리묵을 생각하다 ] 묵을 먹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묵에도 종류가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묵은 도토리묵이다. 특히나 젤리 같은 가을색의 도토리묵은 때깔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냥 천천히 씹어도 제맛이지만 여기에 참기름과 참깨를 넣어 비벼 놓은 간장과 함께 먹을 때의 그 맛이란 한 마디로 제대로 된 묵맛이다. 또 달리 이런저런 고명으로 만든 묵채는 한여름 열기를 말아버리는 최고의 여름별미로 거듭나기도 한다. 나는 이런 묵을 즐겨 먹지도 않았고 묵채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식당에서 찬거리로 나올 때도 손이 가지 않았다. 이처럼 나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묵이었지만 이 가을에 나는 묵에 푹 빠졌다. 마음 고운 사람으로부터 정성으로 만든 묵 한 두 모를 얻어 먹고부터다. 시골..

[명상수필: 또 하나의 기도]

[명상수필: 또 하나의 기도] 봄, 여름을 지나 하나 둘 씩 익어가는 계절, 시가 사람을 자꾸 당긴다. 이렇고 보면 가을은 사람의 계절이요, 시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붉게 익은 대봉감이 반긴다. 푹 익은 것이 나를 닮았다. 떨어지기 직전이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우리 집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한 동네 한 골목이라 비슷한 집모양에 똑같은 감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던 것 같다. 감을 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마당 앞 잘 익은 감을 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감도 감이지만 이른 봄 감꽃을 좋아하시기도 했다. 노란 듯 순백의 감꽃은 어머니의 얼굴에도 목에도 걸려 있었다. 감꽃 같은 어머니의 얼굴은 해를 더할수록 감꽃을 닮아갔다. 하얀 꽃잎이 한 해 두 해 거듭 떨어져 갈..

[명상수필: 사랑의 길 되게 하소서]

[명상수필: 사랑의 길 되게 하소서] 환호공원, 바다를 짚고 일어선 '스페이스 워크'(포항 환호공원에 있는 하늘 구름다리)에 올랐다. 하늘과 맞닿은 가을바다가 일렁인다. 허리를 굽혔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흐느끼듯 바다가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삶과 죽음, 그녀는 갔다. 사랑했던 바다 시인은 갔다. 잠시 나는 떨리는 기도를 올렸다. 명시, 명작, 뭇 시인들의 삶에 있어 영원한 스승이요, 문학적 삶의 보편성과 항구성을 지녔던 여류시인 김남조. 선생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나는 '하늘 구름다리'에서 접했다. 길게 한숨을 토해 내듯 출렁이는 파도도 잠시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이다. 향년 96세, 어쩌면 천수를 누린 축복받은 인생, 하느님 곁으로 훨훨 날아간 순수의 영혼을 나는 경배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명상수필: 형제지정(兄弟之情)]

[명상수필: 형제지정(兄弟之情)] 가을이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역시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요, 사랑의 계절이다. 그것도 봄 여름을 지나 세월 속에 곰삭은 곰탕 같은 사랑의 계절이다. 가을, 오랜만에 동생 집을 찾았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자 서로의 마음은 허접했나 보다. 우리는 부모님이 계실 때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비움이 생성한 또 다른 사랑의 불씨를 돌아가신 두 분이 시나브로 지펴셨나보다. 그렇게 두 분의 마지막 길이 아쉬워 울먹였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한 줌 사랑으로 거듭나 살아 계실 때 못 느꼈던 형제애로 우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족에 얽힌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 계절의 순환 속에 한 가족으로 잉태되어 여름을 지나 가을을 가슴으로 안고 이제 ..

[명상수필: 요놈의 거울]

[명상수필: 요놈의 거울] 거울, 거울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많아지는 것도 그렇지만 생각이 깊어진다. 젊었을 때는 거울을 보면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거울을 보면 자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참을 들여다보면 내가 없고 내 아닌 내가 웃고 있다.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다. 거울 안의 얼굴과 거울 밖의 얼굴, 둘 다 믿지를 못하니 둘 다 내가 아니다. 그러니 거짓인 나를 보며 거짓 맹세를 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타인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이상은 "거울 속에 또 다른 내가 있고 거울 속에 나와 거울 밖의 나는 결코 화합할 수 없다"는 시를 썼다. 이상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거울은 침묵하고 있는데 나는 끝없이 말한다. 이렇고 보면 거울은 멀쩡한데 ..

[산문&감상: 장 그르니에의 부활의섬 리뷰, 외딴섬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산문&감상: 장 그르니에의 부활의섬 리뷰, 외딴섬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장 그르니에의 , 《섬》에 대해 작가는 말한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그런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롭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활동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섬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한 인간. 섬-들, 혹은 인간들. - 위의 글은 에 달린 각주로서, 장 그리니에의 전체를 관통하는 섬에 대한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 이야기들로서 섬의 정의를 형상화고 있다. 의 주인공은 백정이다. 정신 병자인 그는 횡설수설 섬의 한 모..

[명상수필: 사람이 그립다]

[명상수필: 사람이 그립다] 내 마음 하나 읽어 줄 사람이 그립다. 분명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나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아하,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틈새를 잘 노리는 그는 세월 속에 깊숙이 들어와 내 심장에 머물다가 내 눈을 훔쳐가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가까운 듯 멀리 저편에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나도 내 심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어이 마음속 자리 잡은 어둠이 그의 눈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맑은 샘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다행이다. 가끔은 하늘을 바라보며 사람 그리운 생각에 빠지곤 한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내 가슴속 샘물도 마르지 않으면 좋겠다. 나무와 나무 그림자 나무는 그림자를 굽어보고 그림자..

[명상수필: 늘 추억의 그 맛]

[명상수필: 늘 추억의 그 맛] 아들, 며느리와 함께 '만선(滿船)'이라 불리는 중화요리 음식점에서 야끼우동, 야끼밥, 자장면을 먹고 왔다. 실내가 아득하고 깨끗한 분위기가 한층 입맛을 당긴다. 좋은 분위기에서 여유롭게 조금씩 나누어 맛을 보는 것도 가족이 아니면 어려운 것. 음식 맛도 맛이지만 가족 간의 마음을 꼭꼭 씹어 먹는 그 맛을 어이 표현해야 하나. 그리고 아들과 둘이서 먹었던 그 옛날의 자장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하지만 자장면 맛은 아무리 고명과 빛깔이 달라도 맛만은 늘 추억의 그 맛이다. 정진권의 에는 추억이 있다. 파리가 날리는 허름한 집, 그 쫄깃쫄깃한 면발. 그러나 이제 그런 자장면 집은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는 찾기가 힘들어졌다. 사라져 가는 훈훈한 인정..